예술이 필요한 시간

온 세상이 캔버스 - 워너 브롱호스트 전을 다녀와서

by 나나스크



나에게 인스타그램의 최대 단점은 시간을 많이 뺏긴다는 것이다. 한번 클릭으로 20분은 우습다. 클릭 한 번으로 내가 원하는 정보들이 알고리즘의 파도를 타고 넘실대며 나를 유혹한다. 그 많은 유혹들 중에서 진짜를 가려내는 건 내 몫이지만 AI가 내 취향을 잘 파악한 덕에 흥미를 돋우는 선택지들이 제법이다. 내게 필요한 걸 내가 일일이 찾을 필요 없어 내 시간을 아낀 다는 점에서는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으려나?

어쨌든 그중 우연히 보게 된 전시회 광고가 있었다. 심플하고 귀여운 그리고 사실적인 묘사의 그림들이었다. 배경의 색 조합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기분 전환하기에 맞춤인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리버드 할인 기간 동안 만원의 행복으로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었기에 티켓 사용날짜를 확인 후 바로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겨울에서 봄이 오는 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티켓 사용 마감일은 점점 다가왔다. 마침 만나야 할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함께 가기로 했다.





전시의 시작은 온 세상이 캔버스라는 제목으로 작가가 전시장에 방문했을 때 남겼다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온 세상이 캔버스라니.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캔버스라는 얘기 같았다. 어쩌면 나도 캔버스 위의 주인공이라는 얘기처럼 들렸다. 개개인의 일상이 모두 캔버스 위의 그림이고 그것이야말로 예술이라는 것. 내가 느낀 점은 그랬다.


조색 작업을 한 버려진 시멘트가 특유의 질감을 가진 멋진 배경이 되었고 그 위에 그려진 작은 인물들의 디테일이 보기 좋았다. 그 인물들은 그저 나처럼 길을 걷고, 우산을 쓰고, 잔디밭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초록색 배경이 두드러진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파란색 배경이 두드러진 작품에서는 물과 관련된 인물들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깨알처럼 작은 인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까? 상상하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공들여 보고 있는 인물들한테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일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다 혹은 수영장 한가운데 띄워 둔 튜브 위에 누워 있는 모습. 공원 잔디밭 한가운데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는 모습. 아이와 함께 서핑을 즐기는 모습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다. 알아차리는 순간들이 좋았다. 즐거웠다. 내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작품 하나하나를 아껴보면서 친구는 나를 나는 친구의 모습을 각자의 카메라 안에 담았다. 내가 감동한 그림의 디테일에 친구의 의견을 물었다. 친구가 어떤 순간을 알아차렸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혼자 왔다면 나누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실컷 나누는 동안 4개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예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슬픔은 잊고 본 적 없는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다시 눈을 반짝이고 행복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위대하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우리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시를 보기 전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현실이라고 믿는다.

내가 사는 세상을 나의 캔버스라고 생각해 본다. 이미 그려진 수많은 순간들이 있고 인물들이 있다. 다 마음에 든다고 하면 사실이 아니다. 앞으로 그려질 순간들 역시 다 마음에 들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순간들을 더 많이 채워 넣을 거라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 흘려보낼 시간들을 붙잡아 내 눈이 반짝거릴 풍성한 그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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