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서랍
지난 4월 아이의 9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휴대폰을 선물해 줬다. 한국나이로 10살. 아이에게도 드디어 개인 전화가 생겼다. 아이는 친구들과 번호교환하는 재미, 엄마아빠와 문자를 보내는 재미 그리고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재미에 푹 빠졌다.
부모님 집에 오는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고 생각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역시 힘들긴 하다. 엄마 아빠가 어서 서울로 이사 오면 좋겠다 생각이 들다가도 시골에 내려온 김에 우리 동네와 전혀 다른 경치와 풍경을 마주하면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전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각자 낮잠을 때리고 멍한 오후였다. 엄마가 아파트 주변에 모내기를 해놓은 논이 지금 보기 좋다고 하신다. 그렇게 주변 산책을 나섰다.
모내기가 막 끝난 논부터 온갖 채소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장관이었다. 아이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빙의한 마냥 끊임없이 동영상을 촬영하고 사진을 찍어댄다. 그런 모습이 마냥 웃기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낮에 찍은 사진들을 함께 보며 하루를 복기해 본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제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도 어렸을 때 사진이 있어요?"
그 한마디로 아빠의 서랍이 열렸다. 아빠는 어디선가 작은 상자 두어 개를 가져오셨다. 그 안에는 원래 앨범에 꽂혀있다가 너무 오래된 앨범의 필름종이들이 다 찢어지고 헤어져 보관이 불가능해진 사진들이 두서없이 섞여있었다. 아기 때의 내 사진부터 성인 때 찍은 사진, 내 친구들의 사진. 엄마아빠의 젊었을 때 사진부터 비교적 최근 사진까지 뒤죽박죽 섞인 사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의 각자의 모습들을 우리는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에 눈이 간다. 지금의 나보다도 더 어린 엄마의 모습.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짧은 커트머리에 파마를 한 모습이었다. 조금 길어서 단발이 될 듯 말듯한 길이가 되면 엄마는 어김없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셨다. 사진 속 엄마는 스물이 갓 넘은 모습처럼 보였다. 그때 당시에는 사자머리라고 해야 할까? 지금 대중적인 히피펌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강렬한 웨이브파마가 유행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뿐만 아니라 엄마 친구분들의 머리도 한껏 부풀어있었다. 유행을 좇는 엄마의 모습이라니. 엄마에게도 그런 시절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전혀 목격해 본 적 없는 모습이기에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다른 사진 속의 엄마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숱이 많고 모발이 굵고 붕붕 뜨는 스타일의 엄마의 머리카락이다. 엄마의 긴 머리가 항상 궁금했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잘 어울렸다. 엄마는 긴 머리가 안 어울려서 해본 적이 별로 없다고 하셨지만 처녀 적 엄마의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긴 머리였다. 엄마도 긴 머리를 좋아했구나. 오랫동안 단발을 유지하다가 나도 최근 머리를 길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아주 긴 머리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기르는 중이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내가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걸까?
내가 알던 엄마의 얼굴이랑은 조금 다른 앳된 모습의 엄마. 내가 20대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저녁에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나에게 하는 잔소리인 듯 엄마 본인에게 하는 넋두리인 듯 말한 적이 있었다.
" 아이고, 우리 딸이라도 저렇게 신나게 놀러 다녀서 다행이네."
그때는 매일 내일 없이 노는데 정신이 팔려 엄마의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걱정 없이 마냥 놀 수 있는 나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순식간에 떠오른 그때 엄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을까? 사진 속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는 마음이 조금 아리다. 사진 속 엄마의 표정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면 내 마음이 덜 서글펐을까? 전에는 보지 못했던 엄마의 젊었던 시절. 그 사진 속에서 엄마가 더 활짝 웃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는 여전히 사진을 찍을 때 활짝 웃지 않으신다. 웃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나 뭐라나.
"그래도 엄마, 오늘이 우리 제일 젊은 날이야!"
오늘 찍은 엄마 사진을 들여다본다. 옅은 미소를 띤 짧은 머리의 엄마가 보인다. 사진 찍히는 게 한결 자연스러워진 엄마의 모습에 아렸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앞으로 남길 사진들 속 엄마 얼굴이 항상 웃고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