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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30. 2019

모래놀이치료-그 '아기'는 사실 나였다

자기 연민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모두가 딸을 선호하고 원하는 이 시대에 나는 쌩뚱맞게도 임신 초기부터 아들을 원했다.

그래도 아들은 있어야지, 같은 낡은 사고방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딸보다 아들을 원한 건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웃기는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꾸미는 데 도통 관심도 재능도 없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딸아이의 머리를 정성껏 묶어주고, 아마도 점점 까다로워질 아이의 취향에 맞춰 예쁜 옷들을 입혀줄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내 머리조차 어떻게 하지 못해서 늘 산발을 하고 옷은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입고 다녔는데 말이다!

반면 남자아이들은,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충 머리를 잘라 놓고 옷도 적당히 잘 빨아서 입히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정서적으로도 무뎌서 신경전을 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물론 엄청난 체력을 감당하는 것도 내 몫이겠지만 남편도 있고, 아무래도 '정신적인 고통'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치유하고 나아져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어린시절이 너무 불쌍해서였다. 

늘 불안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서는 겉돌고, 마음 아프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거의 없을 정도인 내 어린 소녀시절은 지금의 내가 아무리 행복해져도 영영 치유할 수 없는 어두운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딸이 나보다 행복한 삶을 살면, 나는 그걸 온전히 축복해주고 응원해줄 자신이 없었다. 

우리 아빠와는 많이 다른 자상한 아빠를 두고, 평생 가정폭력이나 불화 같은 것은 모른 채 예쁜 꿈만 꾸며 자라다가 학교에 가서는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나와는 전혀 다를 소녀시절을 살아갈 내 딸을 상상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나와 무의식중에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엄마답지 못하게 딸을 질투하거나, 질투까진 하지 않더라도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한심한 엄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게 단지 내 '뇌내망상'이기만 하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실제로 딸의 행복을 은근히 질투하는 친엄마의 사연이 적지 않다고들 해서 걱정은 더 커졌다.

그나마 아들이라면 성별이 다르니까 내 어린시절과는 다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임신중기가 되고 판정된 아기의 성별은 다행스럽게도(?) 아들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고 그 전까지 딸을 원했던 남편은 의외로 실망하지 않고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몇 달이 더 지나고 나서 확인한 뱃속 아기의 얼굴은 너무나 남편의 어린시절을 빼닮아 있었다.

나는 남편처럼 귀엽고 잘생기고 착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애착이 한층 더 커졌다. 


내가 받은 상담은 일반적인 상담과 함께 '모래놀이치료'를 하는 코스였다.

모래놀이는 상담실 안에 있는 다양한 피규어나 인형, 장난감들을 활용해 모래상자 안에 특정 상황을 꾸밈으로서 내담자의 내면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치유하는 기법이다.

처음 모래놀이치료실에 들어선 날 내 심경은 솔직히 말해 '내가 번짓수를 잘못 찾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왠지 어린이 대상 심리치료에서나 할법한 프로그램으로 보여서였다. 역시 어린이들이 많이 오는 상담소를 오는 게 아니었나, 게다가 이름도 '놀이'라니. 내가 이런 걸 할 때인가? 나는 지금 출산을 앞두고 심난해 죽겠는데?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모래놀이치료를 검색해 봤더니 부모의 학대나 방임, 정서적 문제를 가진 아이들이 주로 받는 치료로만 나와 있을 뿐 성인을 대상으로 한 사례가 그리 많이 보이진 않았다. 물론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첫 모래상자를 꾸몄고 그때 내가 만든 모래상자의 내용은 나와 남편, 그리고 태어날 아기가 바다 한 가운데 작은 섬에서 사이좋게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수중 생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바다니까.

상담 선생님은 화목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내 열망을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 외에는 다른 등장인물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내 자아가 여전히 깊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즉, 내가 내 상태를 스스로 인지하고 치유하려면 내 트라우마도 '의식화'돼야 하는데 무의식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스스로 콘트롤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평소에는 그럭저럭 안정적인 성격을 유지하다가도 뭔가가 뜻대로 안 되거나 불안해지면 습관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거나 동요하는 것처럼.


출처: 게티이미지


상담 주차가 쌓이면서 내 모래상자도 조금씩 모습이 바뀌었다.

어느 날에는 어린 소녀로 변한 내가 깊은 해저에 묻힌 보물상자와 요정들을 향해 돌고래를 타고 움직이는 모습도 만들고, 잠자리에 든 아기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내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등장인물은 나와 아기, 남편을 제외하고는 동물 같은 것밖에 없었다.

친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날은 나와 남편, 아기가 깊은 숲속에서 캠핑을 하는데 밖에서 검은 곰 한 마리가 호시탐탐 먹을거리를 노리고 있는 모습을 만들기도 했다. 검은 곰은 감추고 싶은 어두운 면이라는 해석이었다.

그 다음 주에는 내 아기를 둘러싼 숲속 동물 친구들이 무서운 검은 곰을 철창 속에 가두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만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상담선생님의 질문에 '아이에게 든든한 친구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요'라고 답했다. 친구가 늘 없었던 내 어린 시절과 다르게 내 아이에겐 친구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만삭을 앞뒀고 상담 회차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막연하기만 했던 모래상자 꾸미기도 이제 한결 익숙해져서 나름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칠 정도였다.

마지막 시간에 내가 꾸몄던 모래상자는 역대급으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왔다. 나와 남편, 우리 아이가 외국의 테마파크에 놀러가서 공룡옷을 입은 사람, 공주 분장을 한 사람과 인사를 하고 놀이기구를 타며 즐겁게 노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내 모래상자에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동물들만 나올 뿐 그 어떤 사람도 나오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사람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상담 선생님은 그동안 모래상자가 점차 체계적인 구조를 갖춰 가면서 무의식에 빠져있던 내 내면이 점차 의식화되고 치유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평가했다. 처음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 것도 긍정적인 신호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내 안의 생각 변화였다.

나도 모르게 모래상자를 꾸밀 때면 주로 주인공 역할을 맡는 아기에게 내가 어린 시절, 혹은 현재 받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생일은 챙기는 엄마가 내 생일을 잊어버려서 하루종일 서운했던 날은 나와 남편이 집 마당에서 아기의 생일파티를 하는 모래상자를 만들었고, 업무에 지쳐서 피곤할 때는 편안한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들으며 꿈나라로 떠난 아기를 만들었다.

모래상자 속 아기는 결국 나였고, 내 내면 속에서 여전히 치유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어린 나였던 것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제공해주며 결국 어린 나를, 그리고 현재의 나까지도 치유하고 있었다.


어릴적의 내가 불쌍해서, 딸을 낳으면 질투하게 될까봐 아들을 원했던 나는 사실 내 아이를 '타자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내 아이는 아들이든, 딸이든 그저 낯선 타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아이의 행복은 결국 어린 나의 행복이었고,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딸을 낳으면 질투하게 될 것 같다는 임신 초기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를 통해 스스로 치유받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지는 육아인데 치유가 되다니? 

이전의 나는 그런 말들이 도무지 와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얼핏 알 것도 같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결국 다른 관계로 고칠 수 있듯이, 상처받은 부모의 어린 자아를 그 아이가 고칠 수도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이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앞서 말한 '철창에 갇힌 검은 곰'을 보며 상담 선생님은 가정환경과 과거 트라우마라는 어두운 면을 철창 안에 숨기기보다 당당하게 드러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도 가까운 친구들을 믿고 가정 환경을 얘기했다 나중에 은근히 약점처럼 거론되고,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가정환경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던 역사들을 떠올리며 '그건 아닐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여러분들이 보고 있다시피 내 가정사와 과거사를 글로 써서 공개하고 있다. 물론 필명을 쓰고 온라인상의 고백이지만, 상담소를 처음 찾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이런 용기를 낸 것도 모두 아기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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