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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Dec 06. 2015

너의 잘못이 아니야

4년간의 '언시생' 생활이 남긴 것



오랜만에 이 곳에 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지난 10월 호양이를 떠나보낸 뒤였는데, 그 후로 2개월여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일은 모 매체 공채에 최종합격해 이전에 다니던 곳을 퇴사하고 새로운 곳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설명하자면, 그동안 나는 기자 3~15명 가량의, '기자협회'에 속하지 않은 작은 매체들을 돌아다니며 제도권(구체적으로 말하면 협회 가입사) 매체 입사를 준비하고 있었다(전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또 옮기게 됐다). 동기들보다 평균 2~3살이 많은, 꽤 늦은 출발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들어왔기에 마음이 놓인다...물론 어떻게 될 지는 인생사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그러니까 제도권 매체에 입사하겠다고 '마음' 먹기 시작한 건 2011년 정도였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언론고시'의 벽이 무서웠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늘 일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늘 변두리에 머물고 있었다. 맨 처음 들어간 곳은 기자 3명 규모의 전문지였다. 오피스텔 방 한 칸이 사무공간의 전부였던 그곳은 네이버 검색조차 되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악조건 속에서도 중견 매체로 이직하는 선배도 있었지만, 기자 생활은 커녕 사회생활도 처음인 25살의 내가 어떤 교육도 제공되지 않는 그곳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6개월 뒤 비슷한 곳으로 옮겼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명함은 기자지만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기자라고 말할 수 없는' 열등감에 찌들어 있던 상사들은 늘 나를 괴롭혔고, 진지하게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이상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즐비했다. 이곳에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경력 이직을 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예외도 있지만) 대다수의 선배들은 비슷비슷한 소규모 매체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결국 입사한지 일년 반이 지난 27살, 나는 좀 늦은 감이 있는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언시생'이 됐다.


글 쓰는 전공이었고, 기자일을 해서인지 신문을 좀 열심히 읽고 상식공부를 하니까 필기에는 줄줄이 붙었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올라가는 면접 족족 다 떨어졌다. 경력도 있고 명분도 뚜렷하고 특별한 하자가 없는데도 그러했다. 내 글을 부러워하던 스터디 동료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먼저 입사해 떠났다. 면접은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필기시험처럼 '복원'이 올라오는 것도 아니니 당췌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모 대기업에서 언론과 상관 없는 알바를 하며 틈틈히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때마침 집안은 완전히 망했고, 부모님은 다단계에 빠져 그나마 있는 재산을 다 날려먹고 급기야 나한테까지 가입을 강권했다. 당장 짐을 싸서 고시원으로 나갔다. 공부한답시고 벌어둔 돈을 다 날려서(애초에 다니던 소규모 매체 월급도 고작 100만원 좀 넘는 수준이라 저축이 불가능해서 원룸 하나 얻을 보증금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는 은평구의 한 허름한 건물 5층(엘리베이터 없음)에 있는 '창문 없는 고시원' 방 한칸뿐이었다. 나는 28살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고, 120만원 남짓을 받는 비정규 파견직 신분이었으며, 면접에서는 여전히 족족 떨어지고 있었다.


당초 목표보다도 낮은 '기자협회' 미가입사에서도 여전히 물을 먹으면서 나는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원들은 여러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글은 날카로운데, 인상이 좀 유해서 깬다', '학벌도 떨어지고 여자는 원래 잘 안뽑는다', '열정이 없어 보인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그리고 상처가 됐던) 말은 '매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매력에 좀 자신이 없는 편이다. 인간관계에 별 문제는 없지만 인기가 그리 있는 편도 아니고, 말을 재미있게 하거나 리더십이 탁월한 사람도 나는 아니었다.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게 제일 특기인' 재미없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고 '하자'가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취업난 속에서는, 그딴 것도 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기업이라면 입사 자체가 불가능한 29살이 되었다. 나는 어디라도 좋으니 그래도 '정규직'이 되고자 한 신문사에 가까스로 입사했다. 일반인들은 당연히 모르고, 업계에서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든 '마이너' 신생 매체였지만 적어도 오피스텔의 전문지보다는 나아 보였다. 어딜 가나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사언론'이라는 딱지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선배와 상사들은 그럴듯한 매체 이름들을 대며 여기서 열심히 하면 '조중동'은 못 가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간다고 강조해댔지만, 아무리 샅샅이 찾아 보아도 소위 '제도권 회사'로 경력 이직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래 준비하더니 결국 순식간에 포기해버리냐'고 비아냥거리는 주변인도 있었다. 물론 내 자신부터가 스스로를 '기자'라고 설명하기가 민망했다. 주요 현장에 나가는 일도 손에 꼽혔고, 통신사 기사를 베껴서 내 이름을 박아넣는게 업무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언론사라면 '물 먹었다'며 난리가 날 상황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해도 아무도 뭐라하는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기자가 되고 싶어서 입사한 사람들보다는 당장 먹고살 거리가 없어 구직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입사한 사람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왠지 그들처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아 다녔고 중요한 현장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선배들에게 눈치가 보일 정도로 부서장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매체 네임밸류 때문인지, 자주 옮겨다닌 탓인지, 혹은 아직 부족한 포트폴리오 탓인지 경력 이직 네댓 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어디서도 연락이 오진 않았다. 그 사이 6개월 남짓 되는 동안 무려 10명이 넘는 기자들이 퇴사했다. 날마다 오락가락하는 회사 경영정책과 간부들의 잦은 퇴사, 비전 없는 모습에 모두들 비슷한 곳으로의 이직 혹은 아예 다른 일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나는 3명이서 해야 할 일을 거의 혼자 하면서 허덕거리고 있었다. 일단 이곳만 아니면 어디로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야근을 하면서 채용공고들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 원서를 넣다가 서류에서부터 탈락한 한 곳에 별 기대감 없이 지원을 해 봤다. 뜻밖에도 시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언론계 취업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아 시험 대비 '취합'에도 참여했고 퇴근 후 시간을 쪼개 필기시험을 준비했다. 사실 필기까지는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면접이었다. 면접 탈락만 20번이 가깝다 보니 또 탈락할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래도 준비를 안할 수는 없어 퇴근시간 후 추운 카페에서 덜덜 떨며 노트북을 켜놓고(집에 가면 뻗어서 잠들 게 뻔하므로) 예상문답을 정리했다. 면접날이 다가왔다. 또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떨어지면 그냥 다니던 회사 계속 다니면 그만이었다. 좋은 회사는 아니었지만 당장 망하진 않을 것이니 괜찮았다. 무엇보다 떨어져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간 나는 숱한 탈락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문제점을 찾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나는 평가받는 자리에서 자신감이 종종 부족해지고, 긴장을 하고, 말을 그리 유창하게 하지 못하고, 스펙이 뛰어난 '엘리트'도 아니며, '매력적'이지도 않은 그냥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잘못이 아니었다. '금수저'가 아닌 탓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당장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데, 일자리를 구하러 간 자리에서 당락이 결정되니 당연히 긴장되고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사사건건 비교평가를 당하니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한국사회가 진짜로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 사람에게 언제부터 그리 관대했던가?). 의무교육 12년을 거치며 타고난 성격보다는 정해진 모습에 나를 맞추는 데 익숙해져 있어 '열심히 평범'해졌고, 그게 옳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렇게 사니 매력이 없댄다. 누가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그냥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열심히 평범하게 살아온 죄밖에 없었다. 누가 날 거절하고 떨어트린다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면접장에서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내가 지난 직장에서 내온 성과를 주로 부각시켰던 듯하다. 그리고 '떨어져도 괜찮다'는 식으로 긴장을 안 하려고 노력했다(그래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겠지만). 어쨌든 3일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노심초사한 상태였고, 합격전화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간의 고생과 온갖 분석들이 다소 무색할 만큼 당락을 결정하는 건 많은 부분 '운'이 결정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회사가 필요로 하는 포지션과 내가 가진 역량, 경험이 일치할 때 좋은 결과가 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대다수의 회사들이 불합격자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고 있고, 취업난이 지속되면서 수험생 입장에서는 온갖 추측들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틈을 비집고 점술이니, 면접용 성형이니 하는 상술까지 성행하는 판국이다. 팔자가 문제라서, 얼굴이 문제라서 우리에게 돈을 내고 고치라고들 부추긴다. 


지난 4년간(제대로 준비한 기간은 2년 남짓이지만 어쨌든), 내 인생에서 거의 둘도 없을 만큼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나약하고 소심하고 남을 늘 의식하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는 쉽게 공감하지 못했던 어린 아이였던 나는 조금이나마 깊이를 갖추게 됐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교훈은 내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면, 사회가 내게 어떤 평가를 내리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성적으로 스스로를 탓하고 자책부터 하던 나는 그렇게 내 노력과 성과에 대해 당당해졌고,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 바뀐 명함, 오른 연봉보다 몇 배나 더 가치 있는, 4년간의 시간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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