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안개 속에 숨은 사량도, 안개 속에 또렷해지는 추억
첫날,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러 나섰지만, 이슬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출발 전부터 비가 내리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면서 걱정되었다. 이번 봄이벤트산행은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산에서 바라보는 바다 조망을 꿈꾸며 사량도를 선택했건만, 하늘이 그 풍광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41명의 일행을 태운 버스가 통영 가오치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다행히 날씨는 예보를 살짝 비껴가는 듯했다. 희미한 희망의 빛이 마음 한켠을 밝히고 있었다.
산행대장이 되어보니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책임이란 무게가 이토록 무거울 줄이야. 거의 한 달 전부터 회장님과 숙소와 식당을 찾아내고, 예약과 프로그램을 꼼꼼히 준비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의 결정만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전에는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일행들 모두의 기분까지 내 책임인 듯했다. 그 부담감에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완벽한 준비는 없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4시간의 긴 여정 속에 지루함을 날려버리기 위해 준비해온 프로그램과 게임을 실행했지만, 이마저도 장비가 도와주지 않아 실행이 만만치 않았다. 임기웅변을 발휘하고, 궁여지책을 짜내는 동안에도 책임감이 무게로 짓눌렀다.
다행히 일행들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내 서툰 진행에도 즐겁게 동참해주었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내 불안감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통영 도산면에 닿아 첫 점심으로 마주한 멸치쌈밥정식은 예상치 못한 위로였다. 젓가락을 들자마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외갓집 집안이 멸치어장을 운영했던 덕에, 가을 멸치걷이가 끝날 때면 좋은 멸치 한 포씩 나눠주던 그 정겨운 풍경이 떠올랐다. 입안 가득 퍼지는 짭조름한 젓갈 맛이 고향의 추억을 한 모금씩 들이켜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은 금평항으로 향하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40분간의 물길 여행, 창밖으로 바라본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페리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섬의 윤곽이 희미해질 때쯤 금평항에 도착했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섬 전체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었다. 날씨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 하도(아래섬) 트레킹을 시작했다. 칠현산을 오르기로 한 세 분을 따로 내려드리고, 우리는 하도 바다길체험코스로 향했다. 사량도가 지리망산으로 유명한 탓인지, 하도의 바닷길 코스는 아직 완벽하게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덕분인지, 안개 속에서 걷는 길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산길을 연상케 했다. 걱정으로 시작한 여정이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50분간의 여정을 마치고 본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량도대교를 건너 고동산둘레길로 접어들었다. 비교적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걸으며, 드문드문 보여주는 바다와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1시간 30분을 걸어 대항에 도착했다. 그 동안 산행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편하게 걸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시간이다.
저녁 만찬은 기대 이상이었다. 싱싱한 산지 회와 사량도 아니면 볼 수 없는 크기의 해삼과 바다향을 담은 멍게, 봄의 기운에 훈제당한 두릅, 그리고 지역 특산물로 가득한 밑반찬들이 테이블을 장식했다. "역시 여행의 맛은 입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일행 모두가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속 걱정이 한 겹 더 벗겨지는 듯했다.
조금은 낡았지만 넓고 편안한 숙소에서 시작된 저녁 레크레이션 시간, 청솔 형님의 기타와 내 하모니카의 선율이 시작을 알리고 모두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동안 아침의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행의 묘미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밤이 깊어가도 우리의 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각자의 방에서도 이어진 오락과 이야기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게 했고, 청솔 형님과 나는 길가에 앉아 7,80년대 포크송의 추억을 이어갔다. 조용한 섬마을의 밤공기를 타고 흘러가는 우리의 노래는 산책하는 회장님과 몇 일행에게도 전달되어 바닷가로 밤의 음악쇼를 이어갔다.
안개가 섬을 덮은 그날, 우린 풍경 대신 사람을, 조망 대신 교감을 선물 받았다. 아침의 걱정과 불안이 밤의 깊은 감동으로 변환되는 마법같은 시간이었다. 여행은 완벽한 계획이 아닌,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로 채워진다는 것을...
그렇게 쉽사리 흥이 사그라들지 않던 사량도의 첫날 밤은, 걱정과 설렘이 어우러진 특별한 추억으로 밤의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