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품은 섬, 사량도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둘째날:
새벽 3시 15분, 영문도 모른 채 눈이 떠졌다. 낯선 침대, 낯선 공기. 그제야 기억이 돌아왔다. 이곳은 바다가 품은 섬, 사량도. 어젯밤 파도 소리에 맞춰 울려퍼지던 통기타 선율이 귓가에 아직도 맴돈다. 그때의 바람결이 아직도 얼굴을 스치는 듯하다.
새벽 창가로 내다본 바다는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량도의 맑은 풍경은 여전히 안개라는 담요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마치 수줍은 처녀가 얼굴을 가리듯, 섬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고저녁한 아침 풍경이 물안개 속에서 꿈틀거렸다.
부산식당 사장님이 끓여준 광어쑥국에서 봄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쑥의 쌉싸래함이 혀끝에서 달콤하게 변하는 마법 같은 순간. 간밤의 술기운은 어느새 쑥의 푸른 생명력에 씻겨 내려갔다. 몸이 살짝 가벼워졌다.
짙은 안개만큼 무거운 걱정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행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했던 돈지마을 출발 코스를 접고, 수우도전망대로 첫발을 내딛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 새로 합류한 원상형님의 조언이었다.
리더십이란 게 참 묘하다. 때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변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일 테다. 내게 없는 능력은 빌려 쓰면 된다. 그것이 여행길에서 배운 삶의 지혜다. 남들의 경험이라는 등불이 내 앞길을 밝혀주었다.
수우도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상은 하얀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나무들은 안개를 품에 안고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난 길은 마치 신비로운 이계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안개가 내어 준 길을 따라 걸으니, 길가의 야생화들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발길 드문 곳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봐 준 이방인에게 온 마음을 다해 미소를 건네는 들꽃들. 그들만의 축제가 한창이었다.
지리망산의 바위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거대한 공룡의 등뼈 같았다. 사량도가 품은 이 크고 작은 바위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세월의 무게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섬은 바다가 빚어낸 돌의 미술관이었다.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밟을 때마다 심장은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언제 피었을까, 복사꽃 송이들이 이슬을 머금고 우리를 맞이했다. 그 분홍빛 미소는 마치 "어서 와, 기다렸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바위 틈새에서도 생명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험한 암벽을 끼고 돌아가며 첫 목적지 지리산 정상을 향했다. 해발 398미터.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다 하여 '지리망산'이라 불리는 이곳. 진짜 지리산은 보지 못하더라도 섬을 감싸 안은 바다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개는 여전히 우리의 소망을 묵살했다.
능선길은 마치 삶의 갈림길처럼 위태로웠다. 달바위 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설악의 공룡능선보다 더 날카로운 비늘 같은 바위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발짝이라도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를 구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길. 다행히 행정기관에서 설치해 놓은 쇠봉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후 등산객들은 봉잡은 거야, 정말!'이라는 농담이 절로 나왔다.
안개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등산객들도 헷갈리게 했다. 이리저리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마치 무급 알바생처럼 분주했다. 후미에 처진 일행들에게 무전을 날렸지만, 그들 역시 알바를 한 모양이었다.
온 산행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미끄러운 바위와 걷히지 않는 안개 사이에서 준비해 온 간식은 배낭 속에서 쉬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아쉬움이 피로만큼 쌓여갔다.
바위길을 걸으며 들려오는 미끄러지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누군가의 작은 비명이라도 들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산행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모두의 안전이었다.
가마봉과 옥녀봉 사이의 출렁다리는 마치 천국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스타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 그 유명한 팝송이 자연스레 머릿속을 채웠다.
옥녀봉을 지나니 비로소 하산길이 보였다. 사량도 터미널로 향하는 계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행의 끝자락. 한 번도 그 베일을 벗지 않은 사량도의 안개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이 섬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다 보여주지 않는 신비로움.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수줍음.
산 아래에는 노란 유채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안개 살짝 걷힌 마을어귀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짙은 안개 속에서도 우리를 빛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편의점에서 고른 차가운 캔맥주가 목마름을 적셨다. 그 쌉싸래한 맛에 아쉬움도 함께 녹았다.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며 마신 맥주 한 모금이 이번 산행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버스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장군형수가 미끄러져서 절벽에서 굴렀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큰 부상은 아니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도 형수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우리가 시산제를 잘 지내서 이 정도로 끝난 거야"라며 웃음을 지었다. 삶의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 그것이 진정한 여행자의 자세가 아닐까.
그날 사량도에는 여러 번 구조대가 출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일행은 형수의 경미한 부상 외에는 무사히 산행을 마쳤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서둘러 사량도를 떠나 페리에 올랐다. 통영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바라본 사량도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다음에 또 와봐"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통영에서 점저로 먹은 육회비빔밥은 산행의 허기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수지로 향하는 길, 사량도의 안개는 허전함이 다시 찾아야할 희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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