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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Feb 08. 2023

하노이의 타이포 세계로 널 초대할게


박찬욱 감독이 ‘글자풍경’의 유지원 작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과학자의 머리와 디자이너의 손과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인문주의자”

2019년 겨울의 어느 날, INTJ인 나는 저 한 줄평에 더할 것 없는 호감을 느끼며 무작정 그녀가 안내하는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을 따라 여행해 보았다.


본문 첫 장을 넘기자마자 베네치아의 평범한 간판에 깃들어 있는 이탈리아를 마주하며, 거리에서 이처럼 베트남이 깃들어 있는 간판을 만나면 멈춰 서곤 했던 나를 만났다. 세리프와 산스가 무언지 알지도 못했을 때도 나는 그저 글자에서 진한 베트남이 느껴질 때면 멈춰 섰다. 글자풍경 300쪽의 여행이 끝난 후, 날 이끌었던 그것은 바로 알프스 북쪽 침엽수 같은, 알프스 남쪽 활엽수 같은 지역적 생태성을 가진 글자라는 것을 알았다.  


서예 작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글자에 대한 유산 탓인지 모두가 가볍게 사용하는 글자들이 어릴 적부터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한 획마다 공들인 노고가 느껴져서 글자에 애정을 느낀다. 그래서 노트의 구획과 글자의 공간감도 예리하게 바라보곤 한다. 마치 세상의 타이포를 보는 나의 시선에는 시스템이 깔려 있는 양. 길을 걷다 이국 감성마저 더해져 있는 글자풍경을 마주한 날이라면, 그날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쐰 듯 기분 좋은 날이다.


뉴욕에 헬베티카가 있다면 하노이에는 타임즈뉴로만과 성조 표기에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VN아리알이 있다. 공화사회주의 베트남 [독립-자유-행복]을 기록하는 타임스뉴로만의 격식, 성조를 품은 화려한 이탤릭체 Vina 세리프와 모던한 Vn아리알체가 카키색 제복의 정제됨을 닮은 듯 뒤섞여 있다. 요즘엔 젊은 트렌드를 반영하는 타이포의 발전도 빨라 보이는데 60%가 젊은 층으로 구성된 베트남 인구 특성이 담긴 타이포 세상이 오토바이 물결을 타고 흐르고 있다. 이제는 마치 전 세계의 디폴트 폰트처럼 여겨지는 스타벅스 간판을 바라보며 그 주위를 바라보니 그 옆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베트남이 보인다. 베트남만이 가진 타이포의 세계에 외국의 타이포가 곳곳에 어우러져 간지역적(inter-local) 시각을 선물해주고 있다.

 

책장을 뒤적여 막내의 1학년 시절 노트를 들춰보았다. 새로운 공간감이 보인다. 베트남어의 6 성조를 표기하기 위한 공간감을 잘 운용하려면 이리 작은 사각 구획의 단위로 분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꽤 로컬스럽게 보였던 베트남의 필기 노트가 갑자기 하이브리드 공간으로 보이는 것은 놀랍다.


베트남에서 아이를 교육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등 1학년부터 문학을 가르치고 빈 노트와 만년필을 숙제로 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트남인의 저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숨은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1학년의 일 년의 대부분을 이 사각 구획 안에 바르게 맞춰 쓰는 훈련으로 보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초등 1학년과 비교해 보면 불쌍할 지경이었다. 이런 덕분에 베트남에는 명필이 많다. 이미 우리 귀염둥이 막내도 우리 집에서 필기체를 가장 잘 쓴다. 1학년 학급 교실을 둘러보면 여덟 살의 만년필 맛이 깃든 훌륭한 글들이 주르륵 걸려 있었던 걸 잊지 못한다. 볼 때마다 입이 떡 벌어졌기 때문에. 한석봉의 후예들은 반성해야 할까.  


 유지원 작가덕에 글자 생태계를 따라 피어난 유럽과 아시아의 글자 풍경을 넘어, 우주와 자연, 과학과 기술에 반응하는 글자로 스케일이 커다란 여행을 했다.

특히 고된 작곡 행위의 긴장을 이완하는 작곡가의 움직임으로 피어난 마지막 음을 마친 공간의 장식에 대한 설명은 너무 흥미로웠다. 바흐의 음이 침묵한 곳에서 피어난 꽃을 북커버 디자인으로 마무리 한 그녀의 의미를 그리고 그 음을 함께 음미했다.


나는 하노이의 유겐트슈틸에 살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의 아치가 달린 이 건물이 내 맘에 쏙 든다. 그 위에 에크만체 대신, 비나셰리체 대신, 서울 남산체 폰트로 간판을 달아 쓰는 나는 이미 벨에포크의 시절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사소하지 않다고 한 유지원 작가의 말처럼 이곳에 펼쳐진 글자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타문화와 접촉하며 교감하며 사는 나의 이 삶이 참 아름답다. 더 깊이 바라보게 된 일상의 사소함에 깊은 마음의 진동을 경험한다.



#hànội #하노이라이프 #단상 #hanoian #타이포 #typography #글자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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