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유지관

핸드드립 러브

by 간히

마지막을 결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핸드드립 커피세트와 원두를 사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원래 내 밥을 챙겨 먹는 법이 없던 난 절대 혼자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먼저 저녁을 먹고 싶었다. 혼자 저녁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연어와 생선가스를 사 와 초밥을 만들어 우동을 끓이고는 괜찮으니 오늘은 나랑 술 한 잔 하자고 말했다.


핸드 드립 커피세트를 내밀며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준다고 옆으로 와서 보라 고했다.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좋아하는 게 커피밖에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얼굴은 어두웠다. 뒤늦게 알아차린건 그건 그냥 커피 만들기 따위가 아니었다. 유독 생각이 많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리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몰라 헤매는 나 자신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마음 같은 것이었다. 그라인더로 쌓인 걱정과 상처들을 원두와 함께 갈아버리고 떨어지는 샷처럼 마음을 한 방울씩 진하게 내리며 커피 한 잔에 들인 시간만큼 내 시간이 더 단단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난히 배가 불렀던 저녁 정성 것 만들어 낸 연어 초밥이 겉보기에 탐스러웠지 나에게는 초라하게 슬펐다.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 같은 예감 매일 함께 먹던 저녁시간이 엇 나간 탓일까. 그런데도 난 끝까지 갔다. 난 수시로 그의 다친 곳에 물을 뿌려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낫지 않고 곪아 가던 상처는 딱지가 자리 잡지 못해 주기적으로 아려왔을 것이다. 하나의 상처가 아주 많이 아프게 번져갔다. 자주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주고 치료해 줄 걸 그랬으면 흉 안 지고 없었던 듯 사라졌을까. 이제는 매일 흉터를 바라보면서 떠올릴 때마다 아파서 속으로 울겠지.


항상 내가 없어도 잘 살게 만들어줄게라고 말하던 너 그 말을 듣고 네가 사라지는 상상만 해도 눈물을 머금고는 했는데 알고 보니 널 두고 사라지겠다 같은 말이 아니었지 너 없이도 멋지게 살 수 있는 단단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길 바랐던 거였어. 말 한마디 대신 수십수백 수천 개의 행동들로 자나 깨나 옆에서 변함없이 날 성장시켜 준 너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함께 위태로워지지 않고 잘하고 있다고 실패하더라도 결국에는 잘 해내더라 응원해 줬고 주변 사람들이 날 만나는 널 말릴 만큼 항상 부족한 나였지만 넌 언제나 나에게도 배운 게 많다며 고맙다고 말해주었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조롱하는 대신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힌트만 내던지고 지켜봐 주다 힘들어할 때는 정답을 알려주면 너의 방법이 아닌 데 따라 하다가 더 힘들어질 거라고 너의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며 또 다른 예시를 보여줬지. 언제나 날 믿어줬던 고마운 사람 내가 떠나도 붙잡을 거고 집에서 나가더라도 두고 가지 않고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하던 너였는데.


그만하자는 말에 눈을 부릅뜨고 쏟아내던 감정들이 쏙 들어가고 후회만 남았다. 이기고 싶었던 것도 타이르고 인정받고 싶던 것도 아닌데 끝까지 바득거렸을까. 이번엔 진짜 마음의 문이 닫혀서 더 이상 계속하면 못 할 짓을 저지르거나 후회할 거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기적 이게도 난 너 없이 살고 싶지가 않아서 진절머리 날 정도로 붙잡았다. 비슷한 상황의 반복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는데도 난 왜 못 고치고 이제 와서 기회를 더 달라고 빌고 있을까 나 자신이 너무 못나서 화가 났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다 그만하고 싶은 표정에 더 이상 나랑 상관없다는 듯 말하는 입이 많이 지쳤음을 증명하듯 움직였다. 이 상황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 아주 멀리 도망가고 싶어 보였다. 그만하자는 말을 듣고 온몸과 손을 벌벌 떨던 내 모습이 없어지면 내가 정말 죽기라도 할 거 같았다. 그 마음이 나도 무서웠다. 사랑도 하고 정도 많지만 그걸 제쳐두더라도 바다 같은 마음으로 날 품어주고 가르쳐준 오랜 친구이자 스승을 떠나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더 많이 어려웠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빌고 또 빌고 애원하고 설득해서 결국 다시 얻은 기회 난 오늘 죽었다. 정말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기 위해서 죽었다. 지금까지 내 환경, 상처, 슬픔, 아픔, 시기, 질투, 부정 같은 게 내가 기억을 잃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아서 지금까지의 나를 지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기억, 추억, 행복했던 일들은 남긴 채로 하루 이틀은 감정을 0으로 만들어 버린 기계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게 맞나 하는 의문과 의심이 불쑥 찾아왔지만 내가 죽도록 슬프고 힘들더라도 붙잡은 건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붙잡는 게 이미 모든 걸 놓아 버린 널 망가지게 만드는 것 같아 붙잡으면 안 될까 그냥 보내줘야겠다 수백 번 생각했지만 몇 번을 돌아가도 내 인생 제일 잘한 일이라 자부한다. 붙잡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 속에 살았을 테니까.


내 기억 속 널 하나씩 천천히 되짚어보니 단 한 번도 날 위하지 않던 말이 없더라. 그게 날 미치게 했다. 쉴 시간 없이 피로해도 기분 환기 시켜주겠다고 내 손 꼭 잡고 나가던 너. 눈물을 보일 때면 따듯하게 안아주고 장난치며 결국 까르르 행복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지. 매일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고 퇴근 후 두 손 가득 힘들어도 웃으면서 들어왔는데 어디 또 좋은 곳 데려갈지 저장하고 알아보고 너의 검색 기록마저 온통 나인데 나 하나만 보고 살아간다고 말하던 너한테 못할 짓 한 거 같아 슬퍼서 기억들이 떠올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심장이 옥죄었다. 보답할 방법은 내가 커서 널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리라 믿어.


하루가 지날수록 0이던 감정이 점점 회복되어갔다. 일단 감정을 무작정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지쳐버리면 결국 터지는 날이 와서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거 같았다. 그래서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안 먹던 밥도 챙겨 먹고 죽어라 안 마시던 물도 마셨다. 급했던 말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천천히 해서 실수를 줄이고 생각을 오래 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거짓 없이 말하기를 시작했다. 이것도 네가 가르쳐준 거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악의든 선의든 무의식적으로 매일 수많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사회 구성원 친구, 상사, 동창, 애인까지 우리들은 칭찬을 들으면 감사합니다. 보다 아니에요 더 멋지시죠. 더 예뻐요. 싫어하는 음식이지만 저도 좋아해요. 맛있어요. 몸이 안 좋아 보여, 피곤해 보이네라는 말 마저 괜찮다는 대답을 하며 인간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게 편하니까 내가 원하는 걸 말해서 트러블을 일으키거나 상대의 마음에 안 드는 것보다 내가 포기하고 굽히고 들어가는 게 상대도 더 좋아할 거 같아서


솔직하지 못해서 내 마음을 혹사시켰다. 슬프고 힘들고 피곤할 때 나 오늘 힘들었어. 기분이 안 좋아. 너무 피곤해. 같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 말들이 마음 한켠에 쌓여 부정적인 감정 덩어리로 만들어 상대의 마음에 응어리를 지게 만들고 속이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내가 좀 더 무리해서 피곤하더라도 다 끝마치면 상대가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이제는 적정선에서 숨기지 않고 내 감정과 상태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할 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기회와 기다림의 시간을 주었는데 이미 많은 상처를 냈어 고칠 수 있었음에도 이렇게나 많이 늦어서 미안해 자신이 없었나 봐 덕분에 이제야 자신감을 가지고 고칠 수 있게 되었어. 이 모든 것을 온 힘을 다해 모든 걸 걸어 나에게 전부를 다 가져가라고 말하면서 깨닫게 도와준 덕분에 마침내 깨달아가. 전부를 주었는데 내가 다 받아내지 못하던 사람이라 미안해. 듣고 보기엔 쉬운 정석 같아도 겪으면 힘든 세상을 이렇게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주며 언제나 따듯하게 내 옆을 데워주는 너에게 언제나 고마워 난 너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어 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너에게 받은 모든 걸 돌려주고 내 전부를 내줄 만큼.


내 오르골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줘 너의 춤사위가 다시 시작될 수 있게 평생을 바쳐 멈추지 않고 태엽을 감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