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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비 Nov 06. 2017

숨에 집중한다

나는 작년부터 수면무호흡 증세에 시달렸다.

숨에 집중한다.


해야 사는 것인데 의식하지 않으면 제가 하고있는 줄도 잘 모른다. 그건 쉬어지는 숨이다. 몸이 알아서 내뱉는. 그저 살아야 하니 살게 되는 그런 나날처럼. 숨 막히는사회, 숨 돌릴 틈 없는분주함.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호흡도 사치인시대이려나?


나는 작년부터 수면무호흡 증세에 시달렸다. 덕분에 버거운 잠과 무거운 하루가 이어졌지만, 기꺼운 발견도 있었다.


밤새 제대로 숨 못 쉬고 기절로 불량 잠자는 탓에 아침이면 프레셔로 관자놀이를 압축하듯 머리가 띵했다.

단순 어지럼과는 좀 다르다. 어이가 없을만큼, 어리벙벙할 정도로 핑핑 돈다.


그래서 내가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은 숨을 쉬는 거다. 모두가 그리하겠지만 이 숨은 좀 다르다. 일일이 쉬는 과정을 의식하면서, 땀을 따듯 정성 들여 천천히.


공기가 코를 통해 기도를 지나 폐에 들이차는 순서를 생각한다. 눈을 감고 그대로 공기의 이동을 느낀다. 흉부가 팽창했다가 사그라든다. 우리가 들어간 곳을 통해 태어났 듯, 숨도 다시 코를 통해 세상으로 나온다.


숨 쉰다는 건 그러니까, 탄생 같은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하고.


그렇게 몇 분을 호흡하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 전체가 차분히 내려 앉는다. 생각도 차근해진다. 업무나 사람간 일의 순서가 요목조목 정리된다. 무엇보다 기운이 돌고 의욕이든다. 걱정이 옅어지고 뭐든 어느정도 잘 해낼 자신이 생긴다.


꼭 약장수 허풍처럼 들리겠지만, 거짓이 아니다. 숨에 효능이 있다. 숨만 제대로 쉬어도 많은 부분 좋아진다.

부러 의식하며 숨 쉬는 버릇이든 이후 내겐 또 작은 취미가 하나 생겼다. 근교 얕은 산을 오르는일. 너무 가파르고 힘에 부치는 산이 아니라 적당히 산책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산을 자주찾는다.  


나무와 풀이 있어 공기 맛이 다르다. 걸음과 호흡이 경쾌해지고 숨에 리듬이 생긴다. 정상에 올라 크게 숨 들이 내쉴때면 온전한 숨의 질감이 느껴진다. 그런 순간에는 무어라도 흡족하지 않은 게 없다. 다 좋다.


만일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거나, 난감하다거나, 일이 맘처럼 안 풀려서 속상하다거나, 어떤 두려움 앞에 위축되어있다거나, 무기력하고 초조하다거나, 우울하고 힘들고, 어쨌든 부정적인 기운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면 숨을 크게 들고 내어보길. 버리듯 툭툭 한 숨 말고, 버거워 가쁜 숨 말고, 진정하며 보듬듯이.


생각이 생각을 물고오는 법인지라 그런 숨 쉴 땐 생각 자체를 멈추는 편이 좋다. 눈 감아 세상 만사 외면하고 그저 숨만. 그러면서 내가 하나의 생명임을 인지하고, 숨 쉼으로 살아있음을 귀히 여긴다. 숨은 피처럼 하나의 몸에 기운을 줄 것이다. 곧 숨이 돌아 몸이 데워진다. 그건 꼭 토닥이는 엄마 손처럼 이유없이 미덥다. 마침내 숨에게 위로 받는다.


우리 안에 그렇게 새로움이 항상있다. 원한다면 누구나 다시 태어날수 있고, 제 안에서 휴식할 수도 있다. 다만, 숨이란 게 너무 일상적이어서 쉬는 줄도 잘 모를 뿐. 의식하고 쉬었을 때 뻔한 숨이 특별해진다.

 

우리 사는 나날들도 별 다름 없을거다. 쉬어지니까 쉬는 숨처럼 시간이 흐르니 그저 살아가게 되는지도모른다. 문제는 없다. 다들 그렇게 늙어갈 테니. 하지만 특별한 생이 되기도어려울테다. 문제가 없는 생은 재미없다는 게 문제.


하루 종일이 대체 어떻게 지나갈까? 눈 떠 일어나 씻고 일하고 걷고 뛰고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모든 하루의 과정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루 다음 내일을 살고, 그러다 주와 월과 년이 지나 도달하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숨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꼈듯, 시간을 그렇게 찬찬히 들여다보고 흐름에 따라 차분히 움직인다면 내 삶도분명 무언가 달라지지 않겠냐, 싶더라. 숨에 집중하고 난 뒤 내 시간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시간동안 하는 일들의 목적을 고민하게 되었다. 당연한 숨 한 번에도 의미가 있듯 아무렇지 않은 행동 하나라도 허투루 하지않으려고. 그게 서서히 철학이 되더라.


자신이 무얼 하는지 알고, 알려 하고, 작은 부분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는 것.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순간의목적들에  충실히 임하는 태도. 차이란 이런 부분에서 오는게 아닐까?


내 수면무호흡 증상은 많이 호전되었다. 이제는 치료때문이 아니라 숨 쉬는게 나를 바로 살게 하기 때문에 매일 수시로 숨에  집중한다. 쉬어지는 숨이 아니라 쉬는 숨으로. 앞으로 내내 그렇게 살 거다. 살아지는 게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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