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독백 Mar 08. 2024

파의 生

나이 들수록 삶에 숨겨진 지혜를 발견하듯 입은 파 맛을 깨달아간다. 어떤 종류의 고기도 파절이를 만나면 그 누린내를 품을 수 없다. 심지어 치킨 옆에서도 파는 당당히 자리를 지킨다. 사각사각 씹히는 식감은 다른 채소의 맛과 비슷하지만 알싸한 맛을 품은 파의 강단을 따라올 수 있는 것은 없다. 게다가 뜨거운 국물에 몸을 담그고 단맛을 우려내는 모양새도 예쁘다. 살짝 숨죽은 파를 입에 머금으면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느낌이다.


냉파를 좋아하는가? 나는 냉동고 속에서 서리를 맞아 축 늘어진 냉파보다 햇빛의 기운을 머금은 생파가 좋다. 장을 본 날 싱싱한 파를 송송 썰어 고명으로 얹을 때는 음식에 숨을 불어넣는 것 같다. 텃밭이든 화분이든 흙을 갖고 있고 거기에 씨를 뿌리고 가꿀 만한 부지런함도 있어서 파를 키운다면 모를까, 요리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파를 이용한다. 나 또한 그랬었다.


며칠 전에 파를 다듬으려고 씻고 있었다. 물이 흘러내려 파뿌리에 스며들었고 곧 흙 속에 숨어 있던 모습이 드러났다. 아, 새하얗다. 그래서 주례사에 자주 나온 것이었구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태어나서 파뿌리를 처음 본 사람마냥 멍 하니 쳐다보다가 괜히 봤다고 생각했다. 이 예쁜 걸 댕강 잘라 버리다니. 모르고는 해도 알고 나니 차마 손을 못 대겠다.

양파절임 하는 유리병에 물을 채워 파를 가지런히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날 사용할 15cm 정도만 잘랐다. 다음 날 나는 호들갑을 떨며 식구들을 불렀다. 잘려나간 부분에서 1cm 정도의 새 손이 나온 것이다. 큰일이다, 파를 의인화하면 더 이상 못 잘라먹을 것 같은데. 그런데 비죽 나온 것이 아무리 봐도 손이다.


햇빛 한 줄기만으로도 하얀 몸통에서 푸르름을 피워내는 봄같은 파는 거침없이 뻗어나왔다. 파는 키가 작아지는 것에도 주눅 들지 않고 쑥쑥 자란다. 파를 유리병에서 작은 컵으로 옮겨 주었다. 이쯤 되니 파뿌리의 효능이 궁금해진다. 파뿌리에는 비타민C가 풍부해서 감기를 예방하는 데 좋고 피부미용에도 좋단다. 그 외에 성인병, 고혈압, 뼈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니 파뿌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문득 ‘아낌없이 주는 파’가 떠오른다. 제 몸을 키워내 싹둑싹둑 잘라주다 마침내 뿌리까지 내주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살아내는 내가 보였다.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순간에 가끔 떠올려주기를 바라는. 그 기억은 삶 속 위로가 되어줄까.


며칠이 지나 빈 컵을 바라보았다. 파는 다 내어줌으로써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의 서글픔을 이겨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코끝을 울리던 파의 싱그러움과 뭉근히 덥힌 파뿌리차(총백차)애달픈 향이 입가에 맴돈다.

파가 피워낸 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이 자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