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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독백 Sep 05. 2024

[ 오늘의 문장 : 여기에선 아무도 ... ]


오늘은 꼭 알아내고 말거야.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산을 접고 빠르게 걸었다. 비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눈에 잘 띄어 다행이었지만 사람들의 우산에 가려서 뒷모습이 가물가물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그녀의 옷깃을 파고들어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앞섶을 여민 뒤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늘색 비옷이 사라졌다. 그녀는 재빨리 두리번거렸다. 어깨 한 쪽이 빗물에 젖은 게 언짢은지 찡그린 얼굴로 물기를 털어내는 사람, 우산을 결대로 접으며 다음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을 지나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빈 자리에 끼어 앉았다. 결석을 하면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이대로 지하철을 타고 간다면 며칠 동안은 비옷을 입은 그 남자 생각을 하느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와 반드시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자신에게 거듭 약속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열차가 도착했고 곧 검은 콩나물을 가득 실은 후에 기우뚱거리는 듯 출발했다. 사람들이 긴장감을 몰고 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이 근처에 자판기가 어디 있을텐데. 그녀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고개가 멈췄다. 비스듬하게 앉아 썬글라스를 벗는 남자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하늘색 비옷을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녀는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약간 두려웠다. 왜 시각장애인인 척 했어요? 라고 물을까. 뭐야, 스토커야? 적선한 거 도로 줄테니 꺼져, 라고 하면 어쩌지. 한두걸음 걷는 사이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부딪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너무 슬펐다. 아, 괜히 쫓아왔나.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지만 먼 곳을 바라볼 뿐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의 이상한 행동을 처음 본 건 한달 쯤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축축 늘어지는 몸을 끌고 지하철역을 나오던 때 계단에 그가 앉아 있었다. 썬글라스를 쓰고. 옆에 지팡이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시각장애인의 모습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는 천 원짜리 지폐를 놓고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자신이 허기짐을 느껴서였을까. 그녀는 곧 그에게 저녁밥을 사줄까 하는 충동을 느꼈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굳었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노숙하는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고, 구걸을 하는 것도 돈이 목적인 것 같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일어나 걸어 내려갔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지하철역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이 바로 한 달 동안 그녀를 괴롭힌 문제를 해결할 기회였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_ 왜 썬글라스를 쓰고 지팡이를 갖고 다녀요?
_ .....
_ 혹시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면.
_ 아니에요, 그건.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허공에 대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투였다.

_ 여기에선 아무도 나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이 들었어요. 난 그래도 세상 꼭대기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놈이니까. 이젠 아버지가 없으니...까. 내가 썬글라스를 쓰는 이유가 궁금해요? 그러고 싶어서요. 차라리 장님이라면... 보고 싶지 않은 걸 안 볼 수 있잖아요. 세상엔 너무나... 너무나 이기적인 일들이 넘쳐나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조종하려 들고. 가족도 수단으로 끝나지, 결코 목적이 되진 않아요.

그녀는 다 그런 건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그는 가족 이야기를 더 하려다가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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