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에 타자마자 그의 눈은 빈자리를 찾고 다리는 이미 그리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양보해야 할 어르신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녹아내리듯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 아이가 무언가 원하는 것을 엄마에게 말하며 칭얼대다가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철이 규칙적으로 움직이자 그의 정신도 깊은 곳으로 침잠해 갔고 아이의 소리도 그만큼 멀어졌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향긋한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목이 아팠다. 곧 우측 이마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그가 슬며시 눈을 떴고 자기 앞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비스듬히 앉아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상황파악을 해보았다. 자기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우선 그는 곁눈질로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준 사람이 여자라는 걸 알았다. 그가 기댄 어깨 아래로 긴 갈색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팔을 펴 무릎에 책 한 권을 펼쳐 읽고 있었다. 이따금씩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깨가 들썩이긴 했지만, 그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조심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심장이 두근대고 식은땀이 났다. 도대체 어떤 타이밍에 맞추어 고개를 들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이 여자는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있는 거지? 오늘 좀 재밌는 사람을 보는 걸,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읽는 책을 곁눈질로 보기 시작했다. 간간이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오만과 편견>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랑소설을 좋아하는 여자로군. 자신이 어렸을 적 인문소양을 기르기 위해 읽었을 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작품이었지만, 이런 낯선 상황에서 그 소설을 보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그녀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