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독백 Sep 18. 2024

인생이 우리를 길들이는 방법

고등학생 때 엄마와 마켓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에 다다랐을 때쯤 바닥에 500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내가 가만히 멈춰 서서 동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엄마가 "어머, 누가 흘리고 갔나 봐." 라고 하셨다. 나는 응 하고 지나쳐 걸어갔다. 엄마는 내게 왜 줍지 않느냐고 물으셨고 난 내 돈이 아니니 놔둬야 한다고 했다. 엄마랑 잠깐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동전을 그 자리에 두고 집에 돌아왔다.


동전을 두고 온 것이 내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부모님한테는 굉장히 큰 일이었나 보다. 두 분이 한동안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엔 걱정도 곁들이셨다. 너무 양심적이어도 안된다나. 이상했다. 그러면 적당히 양심적인 것은 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괜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냥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런데 혼자 방 안에 있으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보다 적은 액수였다면 갖고 왔을까? 500원이 적은 돈이라고 생각해서 난 줍지 않은 걸까? 만약 큰 돈이었다면 나는 고민했을까? 내 양심은 얼마나 단단할까? 그러다가 문득 500원이라는 동전과 얽힌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칠판 청소당번이 되려고 늘 애를 썼다. 두툼한 지우개를 힘껏 쥐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닦았다. 하얀 선들이 뚱뚱한 헝겊괴물에게 조금씩 잡아먹혔다. 지우개가 지나간 자리는 깊은 초록물 같았는데 선생님이 그 앞에 서 계시면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하늘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재미있었다. 게다가 그 지우개 괴물이 배가 부르면 어느 순간 먹기를 멈추고 눈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난 칠판을 지우며 눈 뿌리기 놀이를 한 후 자리에 돌아가려고 돌아섰다. 그 순간 그 아이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걸 보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아이한테 묻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내 얼굴에 침을 뱉지 않았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를 조용한 모범생으로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부도 꽤 잘했고 장난기 없는 얌전한 아이였다. 난 그 아이가 선생님 책상에 있던 500원짜리 동전을 슬그머니 집어 자신의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 걸 봤다.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보는지 확인하려는 듯 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열 살 아이의 눈에 그건 크나큰 범죄였다. 그곳은 선생님의 책상이었고 그리고 그 돈은 선생님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한테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 아이가 동전을 다시 책상 위에 놓기길 바랐다. 하지만 내게 등을 돌렸다. 난 그 아이를 불러세웠다. 주머니에 넣은 거 뭐야, 라고 하면서.


그 아이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난 화가 났다. 그래서 네 오른쪽 주머니에 넣은 거 뭐야, 라고 더 크게 말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돌아서서 한동안 날 째려보더니 내게 걸어오면서 욕을 섞어 상관하지말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더니 내 얼굴에 침을 뱉고 욕을 했고 나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이어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소란은 잠잠해졌다.


우리는 모든 수업이 끝난 뒤 차례로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말씀드린 후 집에 갔다. 나는 그날의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엄청난 욕을 퍼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고 말로 꺼내어 그 상황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OO가 어제 그런 것은 동생 때문이었다고, 그 돈으로 과자를 사서 동생한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고 말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고도 했다. 선생님은 그런 사정이 있으니 나더러 이해하란 식으로 말씀하셨다. 난 전날보다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형편이 어려우면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도 괜찮다는 말인가. 혼내셨다고는 했지만 혼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을 위해 그랬다는 말을 생각하니, 언뜻 나도 내 동생이 떠올라서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비슷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다시 조용한 아이로 돌아갔다. 아니 이전보다 조금 더 말을 많이 했다. 나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제법 어울리기도 했고 좀더 밝아졌다. 운은 용감한 사람들을 돌본다고 했던가. 비록 아프게 성장할 지라도 꼭 필요하다면 인생은 사람을 황량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 동생을 위해 용기를 낸 아이와 친구의 부도덕함을 바로잡고자 했던 아이. 그 친구가 소도둑이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경험을 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밑에 자리한 마음이나 생각을 먼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길 위에 500원을 그대로 두고 온 것은 어딘가에 있을 옛 친구와 화해하는 것이자 동생의 간식을 챙기는 어떤 아이를 위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요에 파묻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