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먼 길 걸어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8월 5일 새벽 2시 반쯤 사촌 형에게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왔다. 독일에 계신 거 같은데 이 시간에 전화를 하셔서 좀 놀라긴 했다. 살짝 탱탱 부운 눈을 뜨고 핸드폰을 쳐다봤는데 이미 몇 분 전에 부재중 전화 두통 정도 왔다는 걸 알고 좀 안 좋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 설마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형 옆에 계신 고모의 한마디가 핸드폰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왔다.
“ 00아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지금 당장 가서 아버지 좀 깨워. 너희 아빠가 전화를 안 받는다. ”
큰일 났다 싶은 마음으로 곧바로 아빠를 깨우러 갔다. 사실 내 입으로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며 아빠를 깨워야 한다는 게 좀 많이 어려웠다.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기가 정말 망설여지기도 했다. 아빠가 그동안 위암 말기셨던 할아버지를 케어해 드리려 그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았기에 마음이 더 힘들었다. 아빠는 주섬주섬 옷을 급하게 입기 시작하며 고모에게 전화를 거셨다. 옆에 있던 엄마도 중간에 깨서 그런지 비몽사몽인 상태로 아빠를 챙겼다. 원래는 이날 8월 5일 오후 때 일을 마치고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 날 새벽에 들려온 부고 소식은 온 가족의 정신을 깨우기 충분했다.
옷을 갈아입은 아빠는 차키를 집어 들고 급하게 신발을 신으셨다. 그리고 나한테 오후 때 연락할 테니 버스 타고 넘어와라는 말을 하고 나가셨다. 잠을 잘 못 잔 나와 엄마는 그대로 다시 잠에 들었고 나는 아침에 일을 잠깐 마치고 곧바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경기도 이천에 할아버지의 빈소가 차려졌다.
경기도 이천은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온 가족이 명절에 제사를 지냈을 때 이후로 거진 15년 만에 가는 곳이었다. 원래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이 있는 충북 음성을 가기 위해 자주 동서울 터미널을 이용했었는데 고속버스 터미널은 이번에 생전 처음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서울에서 이천까지 가는 노선은 고속버스터미널이 유일한 듯했다. 딱 1시간 정도 되는 거리,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잠깐 보니 이천에 도착해 있었다.
이천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이천 의료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아빠와 사촌 어른분들이 전부 와계셨다. 3년 전 외할머니 장례식 때 이후로 또 상복을 입게 될 줄이야. 장례식은 개인적으로 익숙해지는 것보단 덜 익숙해지는 게 오히려 괜찮을 텐데 시간 지나니 점점 익숙해지는 내 모습을 보니 참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 듯했다. 다들 정말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하필이면 이런 날에 다 같이 모일 줄이야. 중국에서 유학했던 7년을 합해서 대강 10년 동안 못 본 사촌 형, 누나들, 형수님들도 계셨다. 어색 어색한 분위기가 좀 감돌았지만 이내 조문객분들을 받기 위해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할아버지의 자식들 5남매 그중에 막내인 우리 아빠. 막내로서 할 도리는 다한 걸 가족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날 아빠의 뒷모습은 계속 축 처져있었다. 갑작스럽게 와버린 아니 조용히 아주 천천히 쥐도 새도 모르게 오고 있었을 할아버지의 위암,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를 챙기기 위해 계속 서울에서 충북을 왔다 갔다 하며 열성을 다 쏟아부으셨다. 이제는 걷지 못하시고 치매가 오신 할머니까지 챙겨드리기 위해 갖은 노력은 다 한 아빠였다. 소화를 전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토를 하시면 손으로 다 받아내시기도 했다.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왔어도 엄마와 나 동생한테는 애써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셨다. 혼자 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린 시간들이 많으셨을 거라 생각한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빠는 정말 진정한 효자였으니까.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께는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이미 치매 증세가 심하시고 거동도 많이 불편하셨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할머니를 생각하신 분이셨다.
큰 고모부에게 들은 바로는 돌아가시기 한 주 전, 곧 다가올 날을 직감하신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할머니와 그 뒤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식사한 게 이번 연도 5월, 할아버지는 그때도 할머니를 먼저 생각하시며
식당에서도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샐러드를 계속 주문하셨다. 식당 사장님도 흔쾌히 샐러드를 잔뜩 해주셨고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봐 주셨다. 그 이후로 아빠만 지속적으로 뵈러 갔고 나는 나 할 일 하느라 뵈러 가지를 못했다. 조금은 아쉽고 후회스러운 이 감정을 글과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는지.
우선 이날은 아빠만 신경 쓰기로 마음먹었다. 5남매여서 그런지 많은 문상객분들이 오셨다.
한걸음에 달려오신 아버지의 친구분들께도 인사를 드리고 다시 가서 조문을 받고 다리를 쉴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마다 물 한 잔 마시고 담배 피우러 나가서 농땡이를 피우긴 했지만. 조문을 받으면서 오랜만에 사촌 형 누나들과 그간의 인생 이야기들을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너 요만했을 때 본 거 같은데 벌써 다 컸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중국 유학은 어땠어, 여자친구는 있냐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도 같이.
제사를 안 하게 된 후부터 1년에 한 번씩은 가족 모임으로 모이긴 했었다. 물론 아빠만 가끔 참석하고 나는 잘 참석하지 못했고 사촌 형 누나들은 워낙 바빴어서 못 봤지만. 이 이후로 또 언제 볼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분명히 떠나시기 전에 온 가족이 다 모인 이 모습을 보고 싶으셨으리라.
조문 첫날을 잘 마치고 작은 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내가 빈소에 남기로 했다. 다른 가족분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시기로 했다. 아빠는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새벽부터 달려와서 한숨도 쉬지를 못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려나. 나는 끄트머리로 가서 의자 6개를 합치고 그 위에 누워서 잠을 잤다. 잠을 잘 잘 수는 없었지만 나름 이곳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다. 외할머니 영정 앞에서 잠을 잤던 그때가 참 많이도 떠올랐다.
아침 7시 반 가족분들이 오시기 시작했고 나도 그때 딱 맞게 일어났다. 머리도 감지 못하고 초췌한 얼굴로 물 한 잔 마시고 얼른 가서 샤워하고 오라는 큰 고모 말에
후딱 가서 샤워를 마치고 왔다. 아침으로 다들 각자 컵라면과 육개장을 먹었다. 나는 아침 먹으면 속이 부대껴서 식장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모닝커피를 마셨다. 간 김에 가족분들 것도 포장해서 사 갔다. 아침에는 좀 조용했다. 당연히 평일이기도 했고 아침에 오실 수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실 테니 말이다. 다들 오후와 저녁때 많이 오실 테니 마음 단단히 먹자는 마인드였다.
오후 때부터 문상객분들이 좀 오시기 시작했다. 다들 맞절드리고 인사드리느라 다리를 쉬지 못해 서로 로테이션을 돌려 번갈아 가며 쉬면서 조문을 받았다. 중간에는 사촌 누나들의 남자친구분들도 오셨고 한 사촌 형의 여자친구분도 오셨는데 다들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시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럽던지.
나는 언제 어떻게 누굴 만나서 갈라나 하고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족분들께 미리 말씀을 드려놨다. 좀 웃프지만 “ 저 아마도 결혼은 10년 뒤면 가능할 거 같아요. 제가 맨 마지막에 결혼할 것 같습니다. ”라고.
오후 5시쯤 입관을 진행했다. 입관할 때 나는 가지 않았다. 외할머니 때도 그랬고 보면 트라우마가 생길 거 같아서 가지 않았다. 아빠도 그냥 빈소에 있으라고 말렸다.
1시간쯤 지나고 아빠와 어른들이 들어오는데 아빠가 우는 모습으로 들어오셨다. 아빠의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작은 고모는 많이 우셔서 힘들어 보이시는 듯했다.
저녁 7시, 아침 7시에 일어났는데 금방 이곳에서 12시간이 흘렀네라며 서로 놀라기 바빴다.
오후 때는 참 시간 안 가는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시간은 가긴 가는구나 했다. 제일 큰 형이 다 끝나고 12시쯤에 우리 손주 자식들만 따로 모여서 단출하게 다 같이 맥주 한 캔 하자고 했다. 성인이 되고 사촌 형 누나들과 먹는 첫 술이었다. 신기하면서도 시간 참 많이 흘렀구나를 다시금 느꼈다. 이날 중간에 온가족끼리 빈소에서 제사를 한 번 더 지냈다. 장례 절차 중에 하나였다. 두 번째 날은 계속 조문만 받고 잠깐 밖에 나가서 바람 쐰 기억 말고는 딱히 뭔가 없는 듯하다.
저녁 8시쯤 엄마와 동생이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남은 회사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엄마였어서 둘째 날에 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가 되어가고 11시쯤 우리 손주 자식들은 끄트머리에 자리를 따로 만들고 조문을 받고 남은 음식 몇 개와 맥주를 먹기 위해 모여 앉았다. 누나들과 형수님들은 바로 앞 편의점으로 가서 과자와 먹을 거 몇 개를 사 오셨다. 먹으려던 찰나에 조의금 정리를 해야 해서 다 같이 바닥에 모여 앉아 액수를 정산하기 시작했다. 1시간 정도 조의금 정리를 마무리하고 다시 앉아서 제대로 한 캔을 들이켰다. 약간은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맥주를 들이켜니 그나마 그런 분위기들도 조금씩 사라지는 듯했다. 그땐 그랬지라며 옛날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그래도 핏줄은 핏줄인가.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 동생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형들은 이제는 막내마저 술 먹는 나이가 됐네 하며 웃었다.
이날 우리 손주들은 밤을 새우기로 결정했다. 새벽 5시에 발인이어서 그냥 시간도 애매했기에 술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 4시 반쯤 발인 전에 또 한 번 제사가 있어서 할아버지께 인사를 한 번 더 드렸다. 그 이후 남은 짐들을 챙기고 제일 큰 형이 맨 앞에서 할아버지 영정을 들었다.
그 뒤로 다 같이 나란히 서서 조용히 발인을 진행했다. 할아버지 관은 나 포함 형 두 명, 아빠와 작은 아버지가 같이 들었다. 관을 운구차에 싣고 옆에 있던 버스에 다들 올라타서 화장터로 향했다.
진짜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형들 누나들 동생들도 그렇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시간 걸리는 화장터에 금방 도착을 했다. 이때까지도 다들 정신을 차리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 밖에도 많은 운구차량들이 왔었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 듯했다.
관을 옮기고 화장 절차가 시작됐다. 화장까지 하는 시간이 대략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나와 형 누나들은 대기실에서 다시 쪽잠을 청했다. 나름 이 잠 덕분에 다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장을 마치고 다들 확인을 하러 조심스레 걸어갔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진 유골함을 보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우고 남겨진 할아버지의 보철물들을 보여주셨는데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것에 대한 잠깐의 고찰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이곳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셨다. 되게 조용하게 묵묵하게.
화장 절차가 다 마무리되고 작은 아버지께서 유골함을 드셨다. 유골함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가 진행됐는데 질소를 넣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부패 방지 목적이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할아버지 할머니 댁을 향했다. 이번에 용어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노제 행렬이었다. 온 가족이 다 같이 도착해서 맞이한 건 텅 빈 할아버지 할머니 댁. 원래 같았으면 왔냐고 손을 흔들어 주시며 마중 나오셨던 두 분들이셨는데 이제는 볼 수 없는 그저 마음속으로 돌이켰을 때나 볼 수 있는 기억 속 한 장면이 되고야 말았다. 참 이렇게 대가족이 이 집에 모이는 그림을 이날이 되어서야 다시 보게 된 것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댁 근처 15분 거리에 마련된 집안 장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 같이 할아버지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하러 아버지 친구분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으로 갔다.
참 맛나는 곳이었다. 다들 밥을 배부르게 먹고 서로 고생했다고 인사를 나눈 뒤에 나와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다녀와서 잠을 참 많이 잔 거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돌아온 일상. 할아버지께 전하는 마지막 편지를 끝으로 이날의 기록을 마친다.
하늘 맑고 날씨 좋은 날 떠나시네요, 할아버지. 어렸을 적, 다섯 손가락 움켜쥐고 다 써가며 잘못된 젓가락질을 할 때, 할아버지께서 그 모습을 보고 지적하고 가르쳐 주셨었죠. 그 덕분에 젓가락질로 어디 가서 지적받지 않고 살고 있네요.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지만, 평생 갔을 그 잘못된 습관을 할아버지 덕분에 고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먼 길 걸어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가 있고, 제가 있습니다. 그토록 생전에 그리워하셨던 모디 중령님을 만나러 가셨네요. 할머니는 잘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아버지 뒷모습이 좀 처졌어요, 할아버지. 새벽에 갑작스럽게 떠나셔서 그런지, 주무시는 아빠를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이 되더군요. 원래 오늘 아빠랑 저랑 같이 뵈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모습 못 봬서 죄송하고 속상합니다. 행복한 길 떠나시길 바라요. 보고 싶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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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시여, 저희들이 일심으로 염불 하오니, 무명 업장 소멸하고 반야지혜 드러내어 생사고해 벗어나서 해탈 열반 성취 하사 극락왕생 하시옵고, 성불하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