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꽤 오랫동안 연애 휴식기를 가졌었다. 전 남자친구의 바람으로 배신과 인간에 대한 회의감에 시달리며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욕구가 0이었던 시절이었다. 연애 생각이 없으니 긴 머리는 그저 귀찮은 존재였다. 나는 과감히 바가지 머리로 스타일 변신을 했다. 3분 만에 머리를 감을 수 있는 그 희열감이라니..
하지만 주말 사이 달라진 내 헤어스타일을 본 회사 남자 동료들은 기겁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박PD, 머리 왜 잘랐어? 누구랑 헤어진거야?"
"아니요. 연애도 안 하는데 이별은 무슨.. 저 송혜교 머리 따라한건데 기억 안 나요?."
"그건 송혜교잖아..남자들은 바가지 머리 스타일 안 좋아해!"
< 기억하는가? 2018년 방영된 KBS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주준영PD를 연기했던 송혜교 >
난 이런 느낌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5살 꼬마 아이.
아무튼 난 그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스님이 수행자의 길을 가기 전에 머리를 미는 것처럼 모든 연애에 대한 미련과 집착, 욕심을 버리겠다는 마음 수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주 주말, 부모님 댁에 내려갔다. 엄마가 해준 집밥을 먹고 배 뜨뜻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걸려 온 고향 친구의 전화. 그녀는 내게 소개팅을 제안했다. 평소 소개팅을 부탁해도 주변에 해 줄 사람이 없다며 모른 척하던 친구였다. 새삼 놀랐지만 무심한 듯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소개팅을 하게 됐고, 일요일 오후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백 번쯤 생각했다.
‘소개팅 잡힐 줄 알았으면 바가지 머리 일주일만 더 늦게 할 걸..’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난 송혜교가 아니니까...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차피 사진도 못 봤고,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서 맛있는 음식 먹고 주말 마무리한다고 생각하자!’라고 생각하며 도착한 그 순간,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큰 키에 깔끔한 스타일, 모든 게 완벽했다. 오랜만에 설렘과 긴장이 감돌았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스파크가 튀었고, 남자분은 내게 적극적인 호감을 표시했다. 만난 지 이틀 만에 ‘자기’라는 호칭이 나왔고, 매일이라도 보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 꽤 신중한 편으로, 천천히 오래 보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소개팅보다는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연인으로서 감정과 마음의 농도가 깊게 간다.
한데 이 남자와의 썸은 고작 일주일.
만나자마자 자기를 외치고, 매 순간 보고싶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사람이 이렇게 빨리 좋아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주선자인 친구에게 바람둥이 아니냐며 괜한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호감이 컸기에 이미 게임 끝. 맛있게 구워진 대하를 까주며 만나보자는 그의 고백에 나는 오케이를 했고, 우리는 30대 보통의 연인이 되었다.
첫 데이트는 일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쩜 그날의 사소한 다툼이 우리의 미래를 예견한 하나의 시그널이었던 것 같다.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볼 때까지는 참 좋았다. 달달한 눈빛 교환도 하고, 다정하게 손도 잡고. 그렇게 영화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엉덩이로 향하는 게 아닌가. 툭툭. 내 엉덩이를 두 번 치고는 "영화 재밌었어?"하고 웃는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애정 표현일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손길이 다정스럽게 느껴지기보다 불쾌했다.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고, 우리가 더 가까워지면 이런 스킨십이 편해질 것 같다고 에둘러서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자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으며 서운해하는 감정을 내비쳤다. 서로 확연히 다른 연애 성향과 가치관 차이를 확인한 첫 데이트였지만,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만큼 우리는 좋은 감정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이 참 설레고 좋았다.
며칠 후 그는 갑작스레 강원도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못 볼 테니 출장 가기 전날 우리 집에서 하루 자고 가겠다는 말과 함께.
나도 그 사람도 각자의 연애 경험이 있고, 30대라는 나이가 주는 성숙함이 있었지만
나는 모든 게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망설였고 결국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조금은 촌스럽고 투박한 사람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결정이 우리의 관계를 결정지은 건 확실한 사실이다.
강원도로 떠난 그는 연락이 급격히 뜸해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한참이 지나서야 일 때문에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다는 문자가 다였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그의 행동에 대해 남자 후배들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답답해하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진심을 가장 의심했던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짧은 시간에 누군가가 이렇게 좋아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일주일 후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담담하게 그만하자고 말했다. 우리가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
30대에 어렵게 시작한 내 연애는 3주 만에 끝이 났다. 충격이 컸다.
신호대기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텐데. 내 연애를 10만 원 짜리로 만들어 준 신호등.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마음을 열었는데, 같이 밤을 보내지 않아서 헤어진건가?' 라는 생각부터 '내 직업이 문제였을까? 매일 야근하고 데이트도 자주 못해서 그랬을까?' 등등 오만가지 잡념이 나를 괴롭혔다.
헤어지고 2주 정도는 밤마다 울면서 잠들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는 듯 출근해서 좀비처럼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는 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핑계로 혼자 드라이브를 하고 회사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신호 대기에 걸려 잠시 정차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DJ가 말했다.
"세상의 모든 연애 사연을 받습니다. 지금 바로 문자 보내주세요."
DJ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귀신에 홀린 듯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 주차장에 막 들어서는데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떴다. 느낌이 싸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생방송 중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문자 잘 받았습니다. 제보자 님 사연이 연애로 고민하시는 30대 분들에게 엄청난 공감이 될 것 같은데, 혹시 전화 연결 가능할까요?”
“아..제가 지금 회사 땡땡이치고 잠깐 나온건데..전화 연결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직장인이라서요.”
“걱정마세요! 익명 보장됩니다! 편하게 패널들과 이야기만 잠시 나눠주시면 돼요. 부탁드립니다!".
작가님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같은 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도와줘야 할 것만 같았다. 내가 거절하면 또 초조해하면서 청취자들에게 전화를 돌릴 텐데. 얼마나 쪼이는 일인가. 내가 알지 그 마음.
그리고는 친구에게 소개팅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시원하게 외쳤다. “네네! 그럼 할게요!”
그렇게 나는
연애 3주만에 차인
30대 여성 직장인으로
전국 생방송 전파를 탔다.
라디오 DJ와 연예인 패널들은 내 사연을 듣고는 그 남자가 이별을 고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추론했다.
남자 개그맨 패널은 "아마 ㅇㅇ님을 만나는 와중에 다른 여자분을 소개받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별의 사유가 사연자 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세상에 더 좋은 남자는 많아요. 힘내세요!"
여자 패널은 "목소리 들어보니 정말 좋으신 분일 것 같은데 훨씬 더 괜찮은 사람 만날 것 같아요. 그런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며 위로를 보내줬다. 보통의 라디오 상담 코너가 그렇듯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그래, 내 잘못이 아닌 거지?’라는 이상한 안도감과 함께 큰 위안이 됐다. 이후 DJ와 라디오 패널들은 30대의 연애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30대가 되면 여자들보다 더 많이 재고 계산하게 된다'.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다. 하지만 30대가 되면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결정을 빨리 하게 된다.' 등등
30대 연애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이, 게시판에 올라온 한 청취자들의 댓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똥차 가면 벤츠가 올 거예요. 힘내세요.”
라디오 게시판에는 많은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나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한동안은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이 날의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신기한 건 그날 방송 이후 나는 조금씩 괜찮아졌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역시 이별에는 시간이 약이다.
한 달 후, 퇴근길에 열어본 우편함에는 서울 방송국에서 온 편지가 있었다.
편지 봉투 속에 든 건 10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 생방송 전화연결한 청취자들에게 보내주는 선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가 함께 했던 3주의 시간이 겨우 10만 원 짜리 였나..’하는 생각에 씁쓸했지만 덕분에 나만의 콘텐츠(?)를 가지게 됐다며 나를 다독였다. 이 정도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바탕 신나게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아직도 그가 왜 내게 헤어지자고 했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직 20대의 어린 감정을 벗지 못했던 나의 미성숙한 연애가 그 사람에 부족했을까? 하는 마음이.
연애가 끝난 후 유일한 장점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돌아보게 한다는 것,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주어진다.
'똥차 가면 벤츠가 올 거예요." 그 말 덕분에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졌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전 연인에게 똥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될거야! 매번 속으로 외치고 다짐한다.
그때는 많이 아팠지만
그를 미워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지금쯤 그는 누군가의 연인 혹은 남편이 되어있을 것이다. 내게 쓰라린 상처와 아픔을 줬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그런데 원하던 직장으로 이직은 성공했으려나?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이별 선물이 백화점 상품권이라니. 허허.
무튼 나의 치욕스런(?) 연애사를 전국 수만 명의 라디오 청취자에게 공개하고 받은 10만 원 상품권은 어디에썼더라.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