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우깡PD Oct 30. 2022

걸음이 느린 아이

나는 늘 남들보다 한발 늦었다.

# 프롤로그

내가 핸드폰을 처음 갖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의 아버지는 모바일 사업을 하던 대기업 중에 한 곳을 다니셨고, 직원들에게 최신 핸드폰을 특별가로 제공하는 프로모션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핸드폰을 갖게 됐다. 흑백화면에 인터넷도 안되는 깡통폰이었지만 그건 나와 친구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우주'였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와 장난치는 내용의 문자들이 전부였겠지만 그때부터 내게 학업은 더이상 중요치 않았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나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결국 나의 성적은 계속해서 곤두박질 쳤고, 엄마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아야했다. 


20년 전 내가 살던 곳은 비평준화 지역으로 중학교 내신의 성적순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내내 나름 성적 상위권을 유지해오던 나였기에 지역의 명문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어쩌면내타  게 주어진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였다. 


담임선생님과의 면담 후 엄마는 내게서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나는 대입 수능이 끝나기 전까지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핸드폰 압수사건(?) 계기로 나는 내신 올리기에 모든 힘을 쏟았고 결국 합격생 23명 중 21등으로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몰랐다. 이게 느린 걸음의 시작이었다는 걸.



# 고등학교 입학

잠깐의 방황을 마치고 겨우 입학에 성공한 고등학교. 고1이 되자 내 마음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공부가 할수록 너무 재밌고, 잘하고 싶다는 의욕이 앞섰다. 당시 2002년 월드컵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들썩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는데 나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경기하던 날에도 동네 도서관을 찾아가 공부를 했다. 축구 강국 이탈리아와의 피말리는 4강전을 치르던 그날도 학원을 마치고 공부를 하러 갔다. 하지만 그 바람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고2때 시작한 방황은 고3때 절정을 맞았다. 집에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해보겠다며 4인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새벽2시까지 기숙사 독서실에서 문제집과 씨름하는 사이, 나는 창가에 뜬 달을 보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공부는 왜 해야하는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든 마음은 뭘까'하는 질문들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인생에서 가장 집중해서 공부했어야 할 1년동안 나는 가장 고민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대입 수능은 잘 치고 싶었는지 수능을 보러 가던 날, 내가 가고싶던 대학교의 뺏지를 교복에 달고 시험장에 갔다. 참 꿈도 크지.



# 대입 시험 

수능 성적 발표 후, 나의 두번째 느린 걸음이 시작됐다. 내가 원하는 학교를 가기에는 조금 부족한 점수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고3 수험생활 내내 한 거라곤 온갖 상념과 삶에 대한 회한 뿐이었는데, 그거에 비하면 오히려 절을 하며 감사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다음 지망 학교에 원서를 내고 논술시험을 치렀다. 수능 점수가 부족하니 논술 점수가 내 합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결과는 사회과학계열 대기번호 54번. 역시 이번에도 내가 기대한 달콤한 성공은 나한달의 긴 기다림끝에 '추가합격'의 전화를 받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합격 전화를 기다리면서 잠시 재수를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수마저 실패하면 다시는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것만 같았다. 나는 자의반 타의반 방황의 학창시절을 끝내고 스무살 청춘의 삶에 뛰어들었다.



# 취업준비생 

졸업하고 지금 회사를 입사하기 까지 꼬박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방송국PD는 뭔가 화려해 보이고, 재밌게 사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저렇게 간지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도 전공한 게 아닌가? 기자가 될 것을 권유하던 부모님께 결코 PD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취준생활을 시작했다. 1년간은 학교 언론고시반에 다니며 공부를 했다. 하지만 언론사 시험에도 계속 낙방하고, 지역 지상파 방송국에서 1달간의 인턴생활을 했는데도 최종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더 지났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으로 내 몸과 마음은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반이 지났을 때 나는 부모님께 선언했다. 


"저는 이제 방송국PD 시험 준비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겠습니다."


표현은 못해도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만큼,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의 실망과 좌절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엄마가 우연히 TV를 보다가 PD를 뽑는다는 공고문을 보고 내게 바로 전화가 왔다. 


"딸아, 어차피 포기한 거 마음 비우고 여기 마지막으로 한번만 지원해보자."

"엄마, 나 이제 언론사 시험 안 본다니까? 일반 회사에 취직할거야."


엄마의 간곡한 부탁과 긴 설득에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입사지원서를 냈다. 아마 마감시간 직전에 겨우 서류제출을 눌렀던 것 같다. 다행히 계속해서 면접에 올라갔고 마지막 최종 면접을 앞두고 나는 정장을 새로 사기로 했다. 헌데 그 과정에서 엄마랑 심하게 다투게 됐다. 지금도 그때 왜 엄마랑 싸웠는지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엄마가 내게 신용카드를 던지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갔버렸다. 다음 날이 되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엄마도 그날은 자식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외할머니댁에 달려갔다고 했다. 그날만큼은 자기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고. 외할머니 옆에서 그냥 아무말 없이 누워있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외할머니 곁에서 그렇게 '딸'이 되어 엄마는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엄마 내가 미안해요. 어쩌다보니 이 글은.. 계속 엄마에게 사과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엄마의 가출사건 이후, 나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고향집에 내려와 있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매일 친구를 불러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도 시험 준비를 하던 상황이라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커피를 마셔준 게 쉽지 않았을텐데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달 정도 고향에 지내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방송국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결과는 최종합격. 졸업하고 꼬박 1년 반 만에 성공한 취업이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기쁘지가 않았다. 합격자 공고를 보고 거실에서 방방 뛰며 좋아하던 부모님과 달리 나는 이유 모를 허무함과 슬픔이 짙게 느껴졌다. 말로는 다 설명 못 할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또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려서 사회초년생이 됐다. 

그리고 10년의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미혼의 삶

내 나이 삼심대 후반, 올해도 얼마 안 남았으니 정말 눈 깜빡하면 나는 '불혹'의 존재가 된다. 엄마는 내가 회사에 입사한 27살 때부터 부지런히 결혼을 이야기했다. 한창 바쁘고 정신없던 수습사원 시절에 겨우 시간을 빼서 고향집에 가면 엄마는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일단 자기가 마련해 둔 소개팅 자리에 나를 내보내기 바빴다. 학교 선생님, 엔지니어, 한의사, 기업체 대표 아들 등등 정말 다양한 직군의 남성분들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소개팅의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그렇게 꼬박 10년이 흘렀다. 엄마에게 소개받은 남성분들만 해도 한 트럭(?)은 될테니 엄마의 노력이 새삼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엄마의 평생 소원인 딸의 결혼을 아직도 못 이뤄드리고 있으니. 사실 엄마 주변 친구분들은 이미 손자,손녀들을 다 보셨다. 모임에 가면 다들 손주자랑하느라 바쁜데 자기만 할말이 없다고 엄마는 늘 투털거린다. 그리고 매년 명절만 되면 매번 똑같은 이유로 전쟁을 치른다. 한번은 추석이었는데 결혼 이야기에 엄마랑 다투고 밤 11시에 집을 나가 친구네서 자고 온 적도 있다.( 그 친구는 남편, 딸과 함께 살고있다..) 


내가 평생 배우자 없이 혼자 살아갈까 불안한 엄마는 요즘도 사주와 점을 보러 다니신다. 그곳에서 해주는 말이 다 비슷비슷한데도 더 용하다는 곳을 찾고 또 찾는다. '댁의 따님은 혼자 살 팔자가 아닙니다. 걱정마세요' 라는 게 그분들의 공통된 주장인데도 엄마는 도통 믿지 않는 눈치다. 


이쯤되면 포기할 법도 하지만 엄마는 지치지 않고 예비 소개팅남들의 프로필을 열심히 보낸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해야하는 이유 오백 개 정도를 장문의 메시지로 적어놓는다. 나도 안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차면 이성을 만나는 게 어려워질 수 있고, 예비 소개팅남들의 프로필을 받게 될 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내게 '결혼'은 여전히 광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단어다. 

내가 늘 남들보다 한 걸음 느려서 미안해요 엄마, 대신 남들보다 백배로 더 행복하게 살게요. 사랑해요.



#에필로그

'대기만성'.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점집에 따라가면 자주 들었던 말이다. 내 사주를 한마디로 요악하면 이 단어라고 했다. 젊은 시절 내내 고생할 거 다하고, 힘들 거 다 겪어야 한다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정말 잘 될 거라고. 그 터무니 없는 말 한 마디가 내가 남들보다 늘 뒤쳐진다고 생각하고 좌절할 때마다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사실 지금도 매일이 힘들고 우울하고 불안할 때가 있다. 집 한 채 없는 나와 달리 내 친구들은 아파트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다. 혼자인 게 자유롭고 신이 나다가도 가끔 친구들을 만나 현실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오면 갖은 불안과 걱정이 나를 덮친다. 하긴 근데 결혼만이 문제가 아니다. 다음 챕터인 출산도 있지. 


하...나는 남들보다 한 걸음, 아니 두 걸음 느린 것 같다.





이전 06화 영화 '성덕'을 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