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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우깡PD Sep 30. 2022

영화 '성덕'을 봤다.

자신의 스타에게 전하는 숭고한 이별의식

영화 '성덕'을 봤다.

자신이 사랑하던 스타가 범죄자가 되어버린 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실패한 덕후가 되었다.


전교 1등의 모범생이던 감독은 가수 '정준영'의 찐팬이 되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아보고,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외박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스타로 인해 그녀의 인생에는 많은 '처음'들이 생겨났다.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팬사인회에서 한복을 입고 갔다던 이 여학생은 

결국 '성공한 덕후'가 되어 정준영 바라기로 TV출연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에 늘 해피엔딩만 있을 수 없는 법.


2019년, 예능인으로서도 승승장구하던 정준영은 그가 저지른 많은 성범죄들이 밝혀지며 

한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감독이 느낀 다양한 감정과 상황들, 그리고 자신처럼 범죄자가 된 스타들을 사랑했던 덕질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과감없이 들려준다.


영화 감상평 : 그녀의 이야기는 한없이 슬프지만 웃기고, 귀엽지만 애처롭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존재에게 전하는 숭고한 이별의식.




영화를 보는 내내, 학창시절 나의 덕질이 생각났다.

그들은 내게 단 하나의 우주였고, 세상의 전부였다.


당시 나의 스타는 god 오빠들이었다.


중학교 때 나도 god오빠들 때문에 

처음으로 타 지역을 가봤고, 처음으로 외박을 했고, 처음으로 이성과 뽀뽀하는 꿈을 꿨다.(주인공은 손호영)


경제관념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생각없이(?) 용돈을 쓰던 나였지만,

쉬는 시간이면 학교 매점으로 달려가 god오빠들의 사진을 사 모았다. 당시 사진 한 장에 400원. 빵과 과자를포기하고 얻은 만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잡지 속 화보 사진을 오려서 파일집에 넣어 보관하고, 오빠들이 당시 모델로 활동한 'GIA' 의류 브랜드에서 티셔츠를 하나 사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밤이면god 앨범 가사집을 손에 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잠이 들곤했다. 


그땐 영단어 하나보다 오빠들의 노래 가사를 최대한 빨리 외우는 게 내 사랑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수능 공부를 했더라면..

 

아, 물론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본가를 떠나면서 그 보물들은 분실됐다. 엄마의 소행으로 의심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앨범 테잎과 CD는 내가 지켰다는 것. 지금도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앨범이 있는데도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더 깨끗해 보이는 CD를 사서 보관중이다. 캬캬.




며칠 전 병원 검사 때문에 서울을 찾았다.

3년 만에 보기로 한 친구와 약속 장소를 고르는데 내게 옵션은 딱 두 곳.


- 호영오빠가 운영하는 닭 특수부위 전문점이 있는 잠실

- 태우오빠가 운영하는 수제버거 전문점이 있는 압구정


20대였으면 하루에 두 곳을 다 갔을텐데 체력적으로 힘든 나이가 되다 보니, 동선의 최소화가 가장 중요했다.

결국 병원과 가까운 수제버거 전문점을 택했다. 친구의 고마운 배려로 나는 10대 소녀로 다시 돌아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식당에 들어섰는데 나는 1초 만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오빠였다. 


현재도 방송을 많이 하지만 조금 더 편안한(?) 모습으로 변한 태우오빠. 누군가와 사업 이야기를 하는 듯 테이블 분위기는 사뭇 진지해보였다. 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오빠에게 피해를 주기는 싫었다. 

(아마 대부분 팬들의 마음일 듯)


그렇게 먼 발치에서

오빠 한 번 보고 햄버거 한 입 먹고, 오빠 한 번 보고 친구랑 이야기 하고, 행복한 점심이었다.


햄버거를 다 먹을 때쯤, 태우오빠가 일어섰다. 

자연스레 출구 쪽 우리 테이블 옆으로 지나가는데 내 친구가 외쳤다. 


"제 친구가 완전 팬이래요!!!"


오마이갓. 순간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그때 태우오빠가 나를 보며 활짝 웃어줬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 외치고 말았다.


"저 fangod였어요!!!!!!!!!!!!!!!!!!!!!!!!!!!!!!!!!!!!!!!!!!!!!!!!!!!!!!!!!!!!!!"


태우오빠 왈, 

"감사합니다. 식사는 괜찮으세요? 맛있게 드세요."

"네네, 너무 맛있어요. 항상 응원할게요."


나는 푼수같이 양 손 엄지를 치켜세웠다...(아, 왜 그랬지. 너무 창피하다)


그렇게 꿈 같았던 오빠와의 만남은 끝이 났다.

멀어지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은 빨개지고 호흡은 가파왔다. 마치 전 남자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오는 신체적 반응들이었다. 그때부터 후회가 됐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할 걸, 말 한마디 못 꺼낸 지극히 소심한 팬의 슬픈 결말이었다.


# 2019년 god 데뷔 20주년 콘서트 사진.

아이폰 버튼 하나 잘못 눌렀다가 사진첩이 모두 초기화 돼서 남은 콘서트 사진이라곤 SNS에 기록된 두 장뿐.

내 인생에 2019년은 통으로 사라지고 없다. 이 기분 참 별로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성덕' 때문에 나는 오늘 밤을 지새운 채 추억 여행을 할 것만 같다. 

영화 '성덕'의 오세연은 자신의 스타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나는 아직이다.


이제는 그리 뜨겁지도 절절하지도 않지만, 

온돌방의 구들처럼 내 사랑은 오래도록 식지 않고 있다.


오빠들이 있었기에 나의 학창시절은 아름다웠고, 순수했으며, 행복했다.


언제나 꺼내어 볼 수 있는 편안한 사랑으로 남아주기를,

다음에는 꼭 호영오빠가 하는 식당에서 닭구이를 먹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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