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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인가?

<폭싹 속았수다> 영범의 모친을 보고 깨달은 나란 사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은 나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다.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를 정주행 하다 말았다.

어느덧 숏폼으로 접하는 드라마가 이젠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범의 모친의 짤을 보게 되었다.



“얘, 나는 네 아버지 손을 보고 무슨 노가다꾼인줄 알았어!”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는데,

나는 사람을 내 안의 기준으로 분류를 한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아예 관심 없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의 기준이 현재는 나에게 지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과는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다.


그리고 아예 관심 없는 사람은 그냥 무매력으로 느껴지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또 나름 굉장히 중요한 것이

겉모습이다. 이 사람이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어떤 옷을 착용하는지

무의식 속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부끄럽지만 그렇다. 어이없게도 그렇다.


싸구려 제품을 착용하거나 사용하는 사람이 나보다 위에 있거나 ‘

(나만의 오해 또는 착각 또는 망상으로)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냥 분하다.


지금은 정도가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직뿌리를 내린 적이 없던 그 20~30대 시절에 그토록 명품에 집착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를 다닐 때, 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번 한의사인 남편의 이야기를 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의사라는 직업을 나와 동일시하려 했던 못났던 내 모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자격지심에 똘똘 뭉쳤던 모습니다.

(한의사가 굉장히 대단한 직업이라는 뜻이 아님)



영범의 모는 어부의 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준이 오로지 사회적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했고, 자신이 만든 허울뿐인 사회적 지위가 중요했다.


그러니 관식의 거친 손을 보고 노가다꾼의 손으로 보고

그토록 분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영상 속에서의 영범 모친의 분개의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았다.

저런 집안과 사돈을 맺는다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사 한마디에서 나는 내가 영범의 모친의 모습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맞아. 나도 겉모습이 그리 중요했지.

부끄럽게도 옷을 잘 입는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가 아직까지도 중요하지.



말로는 달라졌다고 이젠 허울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곁눈질로 여전히 사람의 겉모습과 사회적 지위를 본다.

여전히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없는 상상을 해댄다.

저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저들이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나는 내 본성을 숨기며 저리 좋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고 배려하고 착한 척을 해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축적된 내 구린 본성을 부수고 싶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 헤르만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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