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마마라톤 이후 곪아 터져버린, 엄마의 일정

발산만 하다가 터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무엇이 문제일까? 엊그제 토요일..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외향인 성격의 지영은 로마 마라톤 이후에 육아가 부쩍 감당하기 버겁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서원이와 지온이를 잘 육아하는 것도 아닌 상태면서

집안일도 처지 곤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효진과 초희에게 과한 대접을 받았다. 이를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급한 성격의) 지영은

스케줄표를 잘 확인하고 모임 날짜를 3월 29일 토요일로 잡았다.

그날도 사실

오전에는 지온이의 미뤄두었던 머리 펌

14시 국립중앙박물관 도슨트

만남 약속은 17시로 잡은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 1건 이상의 약속은 잡지 않기로 결심에 결심을 했건만, 어느새 오늘 한 번만, 이번 주만 이라면서 발산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용실에 도착하여 지온이 머리 펌을 시작하고, 자리에 앉아 일요일 저녁 독서 줌을 위해 책을 읽으려고 가방을 여는 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 생신이 다음 주가 아니라, 오늘이라는데???”


시댁 단톡방을 살펴보니,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5분 동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말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일단 시어머니 저녁 식사약속이 가장 최우선

취소하고 변경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조정을 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여러 상대에게 남겼는지 모른다.


나는 그 많은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남들처럼 몸은 하나이다.

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도 놓지 못하고 다 해내려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는 걸까?



토요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지영은 다투었다. ‘시댁 어른을 향해 존경심’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지영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신혼 초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문제로 남편과 참 많이 다퉜던 지영은 이제 더 이상 시댁 어른들에게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고, 기본만 하고 있다. 그 모습이 무시하는 태도로 보인다니, 참 난감하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토요일, 정신적 소비가 심했던 지영은 잠으로 에너지로 충전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4일째, 소파 위에 방치되어 있는 빨래더미 처치가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도 개도 끝이 보이지 않던 빨래 무덤… 오늘따라 이 빨래 무덤이 고단하다.


저녁 독서 줌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전날 정신적 에너지 소비가 심했던 탓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이날은 서원이의 유치원 동창모임에 키즈카페 공간을 4시간 대여한 상황

진지하게 서원이에게 <오늘은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유치원 동창모임을 안 가면 안 될까?>라고 애원을 했지만

엄마의 상황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9살이다.


저녁 9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지만, 아이들 숙제가 산더미이다.

그것들을 봐주고 있으려니, 왜 집안의 모든 일은 내가 해야 하는지 억울함이 턱밑까지 차버렸다.

화가 났다. 다 던지고 나가고 싶었다.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남편에게 화를 냈다.

(샤워정도는 아빠랑 할 수 있잖아…. ㅠㅠㅠ)


저녁에 침대에 자려고 누워서는 서원이에게 현재 나의 감정상태를 솔직하게 말하자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짜증을 낸 내 모습도 실망스럽고, 그 짜증을 아이에게 이해해달라고 하소연하는 내 모습도 초라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서원이는 <“엄마 이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에게 컵 가득 생수를 떠다 주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혼자 도서관에 앉아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평일저녁에 추사 공부

주말줌으로 윤소정의 생각구독 독서 모임

매일의 기록

미래에 대한 불안함

마라톤 부상

엄마 박지영으로써 아이들 등하교 케어, 학원 라이딩, 병원 스케줄

모래 한 톨도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고 긴장하며 주먹 쥐고 살아왔는데

이제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먹 사이사이로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래들이 속수무책 빠져나간다.



발산보다 수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리 결심하고 머리로도 알고 있는데

발산만하다가 몸이 곪아버리는 꼴이다..


로마마라톤 이후 대부분의 정신적 문제들이 해결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더 곪아터지고 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마음과 시간과 정신을 달래려고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