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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하시라고 준비는 했습니다만

by 김주임

살면서 제일 치사한 순간이 언제인가? 바로 음식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것이다. 맛있게 차려놓고 "기다려 먹으면 안돼." 라면서 아는 맛으로 괴롭게 하는 순간이 가장 치사한 순간이 아닐까?


입주민이 아파트에서 치사하다고 느끼는게 뭐 있겠나 싶겠지만 열성적인 반응으로 치사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운동시설. 헬스장과 골프 연습장이 기본적으로 들어가있다. 규모가 어떻든 기구가 얼마나 들어왔든 집에서 내려가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운동시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미 지어진 아파트에 들어갔거나, 새로 지어졌지만 개인의 사정으로 입주 시기가 늦어지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오직 아파트를 새롭게 쌓아 올려 "이제 입주 하셔도 됩니다. 어서어서 이사들 오세요"라며 '입주 지정기간'이라는 시일부터 들어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쩌면 특별한 경험이다.


운동시설을 사용함에 있어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입주가 시작하는 시점에는 입주 지원센터와 관리사무소 직원이 먼저 들어와서 입주 준비를 한다. 먼저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에서 나와 입주를 도와주는 '입주지원센터'가 있다.


입주 지원센터는 대출이나 집에 들어갈 자잘한 품목을 받고, 집의 내부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계랑기가 얼마만큼 돌아갔고 불은 어디에서 켜고 이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인지 함께 다니면서 설명을 해준다. 중간에 내가 찍은 집이 어떤 하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깐 방문해 볼 수 있도록 키를 받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즉 내가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 입주 지원센터이다.


관리 사무소는 아파트라는 단지 자체를 관리한다. 아파트를 빙글 두른 울타리 밖은 관리하지 않는다. 철저히 울타리 안만 관리하되, 각 세대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울타리 안 조경과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리를 하지만 세대 내에서 고장난 손잡이 열리지 않는 베란다 샷시, 수명을 다한 전등, 입주시 설치된 가구 문짝의 흔들림은 봐주기 어렵다. 이 부분은 자칫 예민한 사항이 될 수 있으니 간단하게 여기까지만 하고 나중에 따로 설명을 하겠다.


이 두곳은 최소한 아파트에 주민들이 들어오고 집을 제외한 시설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시설을 확인하고 고장을 체크하고 현장을 방문하는 역할을 한다. 오롯이 정해진 규범 안에서 행동한다. 결정하는 것은 '오늘 풀을 뽑을 것이냐. 누가 나가서 뽑을 것이냐. 소모품은 어디가 더 저렴한가.' 등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하는 시설이나 방침을 결정하는 곳이 아니다.


답이 나왔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입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운영에 대해서는 결정 권한이 없다. 이 부분을 꼭 강조하고 싶다. 쉽게 말하면 관리사무소는 까라면 까는 곳이다. 바로 동대표님들이 정해서 "이렇게 하시죠."하면 하고 "그건 좀 조금 고민해 보시죠." 하면 기다린다.


입주를 막 시작한 아파트는 이런 동대표님들이 없다. 그래서 운동시설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어떻게 마련 할 것인가. 운동기구는 더 들여올 것인가. 이런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 나눔 자체가 없다.


동대표님이 있으려면 아파트 내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있어야하고, 그 전에 최소 입주지정기간이 끝나더라고 꾀나 많은 사람들이 입주를 해야한다. 한 마디로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어서어서 이사를 와서 선거관리위원회를 신청하는 사람이 있어야하고 그 뒤에 동대표님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하며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투표 하듯, 동대표님을 뽑듯 유세기간도 있고 투표도 진행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뒤에 바로 결정해야하는 여러가지 사안들이 있어서 운동시설을 결정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 부분이 바로 운동시설은 갖춰놓고 문을 닫아놓아 눈 앞에 맛있게 차려진 운동시설을 바라만 보는 이유이다.


보통 입주민들은 이정도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존에 다른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파트 안에 있는 운동시설 이용을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니 헬스장니나 골프장이나 하라고 만들어놓고 왜 문을 안열어?"라는 의문이 드는 것 같다.


많은 주민들이 참을성 있게 몇 주 기다리고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나 방문으로 "헬스장 언제 열어요? 제가 이사들어온지 몇 주나 지났는데 왜 이렇게 안열어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라고 하시면서 혼자 이야기 하시다가 더 화가 나는지 언성이 높아진다. 라마즈 호흡법으로 심신의 안정을 취한 뒤, 차분하게 "여차저차 하여 입주자대표회의가 생기고 나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조금 찌뿌둥 하시더라도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주민들이 이사를 하고 한달 즈음 지나면 이런 전화가 하루에 10통도 넘게 들어온다. 그때마다 같은 말을 하고 또 한다. 퇴근할 때가 되면 턱이 아파서 저녁 입맛도 없다. 하루 종일 말해서 배는 고프지만 턱이 아파서 갓 지은 밥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어느날 부터 헬스장에 대한 문의 전화가 뚝 끊겼다. 나도 모르게 "헬스장 전화만 안와도 좀 살 것 같아요. 오늘은 저녁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며 좋아했다. 알고보니 나의 턱 관절을 불쌍히 여겨주신 과장님이 차려 놓은 음식에 뚜껑을 덮어주셨다. 바로 헬스장 유리문에 '최소 이런 사항이 정해질 때까지는 헬스장 이용이 어려우니 양해 바랍니다.' 라며 안내문을 붙여 주신 것이다.


내가 살던 아파트 헬스장에는 사람도 없던데 이 아파트는 헬스장에대한 열망이 뜨겁다. 아니 활활 타오른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이 사람들은 어디서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열의를 가진걸까.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들이 모인 아파트에서, 아파트는 처음인 나 김주임은 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얼마 없는 내 머리카락을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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