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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오다

"목소리 좋은 네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으면 정말 멋질 거야"

by 진순희
미움 받을 용기 -사진.PNG


넷플릭스의 미드로 하는 영어 모임(넷미인)에 덜컥 신청을 했다. 젊은 친구들만 있는 모임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영어에 대한 흠모 때문이었다. 가히 떠받드는 수준이랄 수 있는 영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고 시절, 그때에도 특별한 교육을 하는 선생님이 더러 계셨다. 우리 반을 가르치셨던 영어 선생님이 딱 그랬다.


수업 방식이 참 특이했다


조별로 토론할 수 있도록 책상을 ㅁ자로 만들어 놓고 수업 시간 내내 영어로만 말하게 했다. 혼비 영영사전으로 단어도 찾고 그 단어를 설명하는 문장을 통째로 외우게도 했다. 영어를 잘하면 사고의 폭도 달라진다며 영어애 대해 남다른 열의를 보이셨다. 게다가 이 선생님은 집중을 하면 본인의 머리가 교실 천장에 딱 붙어서, 붙은 채로 교실 끝가지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매번 이런 믿기지 않는 말들을 하면서 영어 예찬을 했다. 영어는 몸과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며 우리의 혼을 쏙 빼놨다.


또 수업 시간마다 좋은 명언을 나눠주고는 암기하게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Boys, be ambitious를 웅변하듯이 손을 내저으며 낭송을 했다. 심지어 우리들에게 연극도 하게 했다. 교과서에 실린 남학생과 여학생의 대화를 배역을 정해서 하게 함은 물론 단편 소설을 영어로 암기해 연기하도록 요구했다.


내가 맡은 배역에 감정을 넣어 읽고 있던 어느 날 슬쩍 지나가는 말을 하셨다.


"목소리가 참 좋은데. 목소리 좋은 네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으면 정말 멋질 거야"


무심코 뱉어낸 이 말 한마디에 그날 이후 영어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오빠를 졸라 셰익스피어 책을 구해오게 하고 어떻게 하든 영어로 말해보려고 애를 썼다. 물론 며칠 못가서 시들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현실은 어디 그런가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아이들 키우며 영어에 시간을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연히 내 영어 실력은 I love you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내게 영어는 그저 추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지나간 일기장에 불과했다. 딱히 영어 실력이라고 끄집어내기도 부끄러운 영어의 문외한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 속에 묻어둔 이 일기장으로 인해 며칠 전 열등감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그것도 순전히 영어 때문이었다.

넷미인 카톡방에 봉준호 감독의 블랙리스트에 관한 녹음 파일이 올라왔다. 이 젊은 친구들은 내용을 다 알아듣고 봉준호가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다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단톡방에 있던 다른 사람도 창피한 일이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데 영어 쌩초보인 나는 알아듣지를 못해서 대화에 끼지를 못했다. 내가 유일하게 알아듣는 건 그 알량한 '블랙리스트'와 '팍 그네'밖에 없었다.


카톡방의 구성원이라면 의사 표명을 해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논술지도를 수십 년째 하고 있어 나름 토론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그놈의 영어 실력이 딸려서 한 마디 의견도 내놓지를 못했다. 열등감에 속이 상하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캡처1.PNG 어휴, 나만 몰라


열등감 넌 누구냐


<<미움받을 용기>>의 <두 번째 밤>에서는 '열등감'을 '열등 콤플렉스'와 구분해서 말한다. 열등감은 독일어로 '가치'가 '더 적은' '느낌'이란 뜻을 갖고 있단다. 말하자면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된 말이라고 밝힌다. 가치 판단과 관련된 것이기에 객관적 사실과는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주관적 판단이기에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아들러는 열등감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 조금도 나쁜 게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존재 자체가 원래 무기력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로 태어났기에 인간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인 '자기 이상'을 향해 달려간다. 현재의 자기 모습인 '자기 개념'에서 용기를 갖고 자기 이상을 향한 목표를 추구한다. '우월성 추구', 또는 '목표 추구'라고 명명한 이것은 지금보다 더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길 바라며 우월성을 추구한다. 그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자기 이상'에 근접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뭔가 모자라다고 느끼게 된다. 시지프스의 산화에서처럼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바위를 올려놓아도 도로 아래로 굴러내려 가는 것처럼 인간은 결핍을 느끼기에 도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다. 품은 뜻이 넓고 높을수록 여전히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갖게 된다.


우월 콤플렉스 VS 열등 콤플렉스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제대로만 나타난다면 노력과 성장의 기폭제가 됨은 물론이다. 그에 비해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지칭한다.


타인과의 비교로 생기는 열등감에는 우월 콤플렉스와 열등 콤플렉스가 있다. 우월 콤플렉스는 상대보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야 하기에 타인과의 경쟁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력과 같은 건전한 수단으로 용기가 없을 때 '거짓 우월성'에 빠지게 된다. 명품 등과 같은 물건을 통해 아니면 힘이 있는 누군가와 끈이 닿아 있다는 식으로 '권위 부여'를 하면서 말이다.


캡처2.PNG 내 다리가 더 길지 ~^^


반면에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이 타인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다. '불행 자랑'을 통해 자신이 '특별'하다고 인식을 하게 해 오히려 상대의 우위에 서려고 한다. 오죽하면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라고 했을까.


우월 콤플렉스든 열등 콤플렉스던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타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다움에 뿌리를 둔 '본래의 자존감'을 회복해야만 한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미움받을 용기>> 105쪽



<신기한 스쿨버스>를 선택하다


사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열등감은 주관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걸음마 단계인 나의 영어 실력은 누가 봐도 바꿀 수 없는 객관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미드가 어려우면 더 쉬운 버전으로 공부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모양새는 빠지긴 하지만, 모양새가 대수인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영어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마음을 바꿨다.


첫 번째로 한 일은 키즈로 분류된 애니메이션 중에 관심이 가는 것으로 골랐다. <신기한 스쿨버스>를 선택했는데, 문장도 짧은 것이 또박또박 말을 해서 제법 많이 들렸다. 우선 재미가 있었다. 알아듣는 게 많다 보니 흐뭇하기까지 했다.


신기한 스쿨버스.jpg 대본을 출력해 공부할 수 있어 굿~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유튜브에 팝송으로 하는 영어 공부도 있어서 그것도 흥미 있게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팝송 딱 한 곡으로 영어 발음 총정리'는 비틀즈의 Let It be를 갖고 진행한다. 발음을 유창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내 수준에 맞게 공부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유익했다. 물론 만족도도 높다.


캡처6.png

https://www.youtube.com/watch?v=oLhW21HqQ4Q&feature=youtu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나만의 방법으로 해소하고 있는 중이다. 어린이용 교재로 공부를 하니 근사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영어가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영어에 대한 울렁증이 예전보다 많이 없어졌다.


요즘은 공부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넘쳐나고 재미있는 것들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세상이다. 잘 활용해서 최소한 외국인이 길을 물어 오면 단문이 아니라 두세 문장이라도 알려줄 정도가 되려고 한다. 크루즈 여행 가서 안내지

라도 제대로 읽어내고 크루즈 일정 정도는 무난히 소화해 낼 수 있을 정도로 격상시켜놔야겠다.

영어에 대한 열등감은 내 영혼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폭풍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블랙리스트 녹음 파일 사건은 나 자신을 가다듬고 한층 더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의 너를 죽일 수 없는 것은 너를 강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나를 죽일 수 없는 영어는 나를 성장하게 한다.





소네트(Sonnet) 116

-셰익스피어(Shakespeare)/ https://anatta.tistory.com/2007(번역: 모험러)


Let me not to the marriage of true minds

Admit impediments. Love is not love

Which alters when it atleration finds,

Or bends with the remover to remove,

O no, it is ever fixed mark

That looks on tempests and is never shaken;

It is the star to every wand’ring bark,

Whose worth’s unknown although his height be taken.

Love’s not time’s fool,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ed,

I never writ, nor no man ever loved.


참된 두 연인의 결속을 끊을 수 있는 그 어떤 장애물이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으리다 사랑하는 이가

쇠락한다고 같이 쇠락하고 그의 마음이 요동친다고

따라 마음이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 아니다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 표지이니

폭풍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도다

사랑은 모든 방황하는 배의 북극성이니

그 고도는 측량할 수 있으되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구나

장밋빛 입술과 볼은 시간의 굽은 낫에 베어질 수 있어도

사랑 자신은 시간의 노리개가 아니다

사랑은 수 시간 수 주가 흘렀다고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오는 그날까지도 견디어 나가는도다

이 생각이 틀렸고 누군가 그걸 증명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글을 쓴 바가 없고 세상엔 결코 사랑이 존재한 적이 없다

동영상 파일 첨부https://www.youtube.com/watch?v=OlGfB-ou4Yg#action=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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