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란 미움받을 용기를 갖는 것
그간 우리는 누구를 따돌리는 데 오랫동안 동참해 왔다. 그 누군가가 바로 아들러다.
우리는 프로이트와 융만 편애해 왔다. 개인 심리학의 아들러를 아예 나 몰라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변방에 묻힐뻔한 그를 아들러 전공자인 기미시 이치로가 아들러,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기시미 이치로는 <<미움받을 용기>>에서 고가 후미타게와 함께 아들러의 심리학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여낸다. '청년과 찰학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풀어낸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우리를 부추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인간은 모두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드러내고 싶어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로 아주 중요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함은 물론 검증받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을 받으려 애를 쓴다.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발행하는 불편함을 참아낸다. 또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과도한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인정은 일시적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고 아들러는 딱 부러지게 말한다.
아들러는 말합니다. "당신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또 "타인 또한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타인의 시선에 겁먹지 말고,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라. 그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해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도 말고, 자신의 과제에 타인을 개입시키지도 마라. -<<미움받을 용기 2>> 39쪽
그런데 타인의 평가에 조마조마하며 신경 쓰는 것은 평범한 우리네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전직 대통령도 그랬던 모양이다. 정신과 박사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에는 YS가 지나치게 언론을 의식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병적이라고 할 만큼 언론의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 욕구에 매달렸다. 그 부분을 읽으며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YS는 늘 언론이라고 하는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택연금으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자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나을 뻔했다고 탄식을 한다. 끝임 없이 언론의 관심을 받고자 했지만, 그 당시 언론의 관심은 서울 집회가 열린 장충단으로 집중됐다. 때문에 자신의 선거 유세장에 기자들이 한 명도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두고두고 한스러워했을 정도다. 물론 이 경우는 나르시시즘의 인격장애에서 기인한다.
아들러는 조언한다. 인정 욕구에 목말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타인의 인정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인정 욕구를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인정 욕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과제 분리'를 통해서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 과'과제 분리'를 통해 타인을 친구로 보면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과제 분리'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지 않게 한다. 과제를 분리하고 자기를 수용함은 물론 타자에 대해 공헌한다. 이렇게 할 때 공동체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아들러는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는 타자 공헌을 하라고 한다. '공헌'이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모들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봉사활동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은 모두가 타자 공헌에 속한다.
'소속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본다. '소속감'을 다양한 욕구 중에서도 기본적인 욕구로 떠받드는 것은 이것이 고립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고립은 더 나아가 생물학적인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이 '나'는 '그 외 다수'로 있으면 안 되네. 언제, 어느 때라도 나만의 있을 곳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지. '여기에 있어도 좋다'하는 소속감이 흔들려서는 안 되네
.
소속감이 없어지면 정체성마저 위태롭다. 명퇴 이후의 많은 퇴직자들의 삶이 위축되고 단조로워지는 것만 봐도 소속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미드 <굿 플레이스>에는 다소 뻔뻔한 삶을 살아왔던 엘리노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실수로 굿 플레이스에 오게 되었지만 "여기에 속하는 사람"으로 남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소속감은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음으로써 생기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갖게 된 지위는 '그 외 다수'가 되지 않도록 기여한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로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겪은 경험이라도 누군가는 비극의 시작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바꿔야 할 계기로 삼는다. 이렇듯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새로운 가치관을 선택할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현재의 순간에 사건은 일어났고, 그것은 내가 해석하고 선택함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지금 당장 변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아들러는 우리의 옆구리를 넌지시 건드린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에 따르면 문제의 원인은 모두 과거에 귀속된다. 자신의 행동을 어떤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라며 합리화를 하게 된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기에 어찌할 방도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놔둘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아들러는 이러한 현재의 불행을 트라우마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인간 행동의 이유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었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긍정적인 편을 선택할 수 있기에 더 나은 현실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아들러를 소환하는 이유이다.
아들러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방점을 찍어 진지하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 비록 이곳이 비루한 현실일망정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내라고 속삭이듯 다가온다. 과거의 후회나 트라우마는 없다. 단지 트라우마에 허우적대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재의 나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라도 인정 욕구를 포기하는 것은 마땅하다. 인생은 '현재'라는 '찰나의 순간'을 모아가는 과정이기에 특별한 결과를 추구하느라 소진하지 않도록해야한. 아들러는 우리 삶이란 단면 단면으로 이루어진 만큼 그 점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갖는다고 봤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그 하나하나에 색을 입히며 참되게 의미부여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을 향한 기대이다. 그 기대를 중심에 두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신에 대한 불평이나 미움도 줄어들게 된다. 특별해지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 공동체를 조건 없이 신뢰하고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이 아들러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리라.
<<미움받을 용기>>는 부드러운 콘 속에 호두를 듬뿍 넣어 중간중간 멈춰서 씹어야 했다. 후루룩 아들러를 맞이할 수도 있지만 밑줄 그어 읽어내려가다 보면 고단백 고칼슘의 영양덩어리를 섭취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미움받을 용기를 갖는 것.
하여 그대 자신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허許하라.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알고 이해하는 것. 아들러는 그것을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했네. -44쪽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 지침에 따라 살 수 있으면 저절로 '공동체 감각'에 도달한 다고. -58~59쪽
공동체 감각에 관해 아들러는 기꺼이 이런 표현을 썼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61쪽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 지는 것이 아닐세.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지. -2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