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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좋은 나이예요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짧게라도 자주자주 만드는 것이 행복이다

by 진순희

마흔넷의 동화 작가가 아이랑 노는 이야기를 브런치에 올려놨다.

보면서 '참 좋은 나이네' 하면서 댓글을 달았다.


마흔네 살은 딱 좋은 나이예요. 뭐를 해도 좋은 나이지요.

풋풋한 스물둘도 아니고

불안한 서른셋도 아니고

어정쩡한 쉰다섯도 아니고 무얼 하기에 망설여지는 예순여섯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앞으로 나가기엔 늦어버렸다 싶은 일흔일곱도 아니어서요


마흔넷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손이 덜 가는 때이다. 나를 채우기 가장 좋은 나이이다. 밤과 낮이 바뀐 갓난쟁이를 돌볼 때는 원 없이 잠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두 녀석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방안을 헤집고 다닐 때는 쟤들이 언제 커서 제 몫을 다하는 휴먼으로 클까 하는 때도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잠깐 눈에 안 보인다고 무슨 불에라도 데인 듯이 울어 젖혔다. 두 녀석이 울면 행여 위층 아래층에서 인터폰이라도 올까 봐 마음을 졸였다. 특히 위층의 할머니는 깡마른 데다가 신경질도 많아서 툭하면 뛰어 내려와서 짜증을 부렸다. 심지어 길에서 만나 인사라도 할라치면 우리 애들 때문에 도통 잠을 못 잤다고 불평을 해댔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할 수 없이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놓고 볼일을 봐야만 했다. 살짝 열어놓고는 "엄마 여기 있지요"를 외쳤다. 빼꼼하게라도 이렇게 엄마의 존재를 확인시켜 줘야 아이들이 안심을 하고 놀았다. 오죽하면그 시절엔 아이들 때어놓고 편안하게 목욕탕 가는 게 소원이었을까.


캡처.PNG 출처: blog.skenergy.com- 나이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정말!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다.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주체하기 힘든 시간을 그것도 남의 시간을 부러워할 시기가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연세 드신 분들이 두 아이에 파묻혀 헉헉대는 내게 "참 좋은 때다" 할 때도 "아이고 좋으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보셔요. 아니면 저랑 바꿔서 살아볼래요? 목욕 한 번 마음 놓고 못하는 제가 그렇게도 부러우신가요"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나도 그렇게 좋은 시절이 있었다. 다만 그때가 좋은 시기였다는 것을 몰랐을 뿐. 내게도 푸릇푸릇한 시절이 있었다.


마흔넷이 부러운 이유는 싱싱한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나이는 육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무엇을 하기에도 늦지 않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시야도 확보된다.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야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생긴다. 마흔넷은 나를 돌아보기에 딱 좋은 나이이다. 일하기도 좋은 시기이기도 하고.


마흔넷이 가져다주는 객관적인 지표는 싱싱한 생동감이다. 물론 주관적으로도 꽤 안정감이 있어서 그런지 표정도 편안해진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시기부터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돈의 기운도 그때부터 활발해진 듯싶다.


내가 이렇게 턱없이 마흔넷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늙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당찮게 젊고 싶지는 더더욱 아니다. 곡식으로 치면 낟알이 여물어지는 시기가 사십 대인지라 건강한 중년이 쭈욱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인가.


그나마 유엔의 100세 시대 생애주기가 위안을 준다. 1세에서 17세까지가 미성년이고 17세에서 65세가 청년이란다. 흔히 노년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65세에서 79세가 중년이고 79세에서 99세가 노년이라고 정의한다. UN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직 나는 청년기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은 적어도 갖지는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아직 중년기에도 접어들지 않은 팔팔한 청춘인데 불안은 무슨.

캡처7.PNG <누가 뭐래도 난 청춘이네, 청춘! ㅎㅎ>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읽으며 커다란 깨우침을 얻었다. 설사 중년의 한가운데 있더라도 못할 게 없으리

란 생각에서였다. 평균 나이 72세로 현역으로 살고 있는 16인의 인터뷰를 보면서 생각했다. 중년기에도 접어들지 않은 사람이 걱정이나 하고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이분들은 무어라고 하실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기도 안 차다는 듯이 "거 참 젊은 사람이 왜 그래" 할 것 같다.


특히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와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의 저자 이근후 선생의 톡톡 뒤는 삶의 자세를 배우고 싶다.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로 회복된다"는
그 구절도 책갈피에 껴두고 싶은 문장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슬픔이 작은 기쁨으로 되살아나지는 않겠지만 잠시라도 그 고통을 잊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순간순간 작은 일에 활짝 웃으며 기뻐하다 보면 고통은 점점 지연될 것이다.


저자 이근후 선생은 하루하루의 불안을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되도록 길게 만드는 거"로 달랜다고 말한다.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길게는 못 만들지언정 짧게라도 자주자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나이를 부러워하면서 도대체 딱 좋은 나이란 언제일까 생각을 해봤다. 현역으로 지금 있는 이곳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때, 그때가 딱 좋은 나이가 아닐까.


언젠가 읽었던 글이 생각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글이었던 것 같다.

바람 부는 날도 좋고
눈 오는 날도 좋고
햇볕이 쨍쨍한 날도 좋고
비 오는 날도 좋다
내 마음만 괜찮다면
캡처3.PNG <https://m.blog.naver.com/ 호반의 불꽃>- 그래 ~~ 삶이란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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