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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01. 2020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독자에 대한 경의를 담은 글쓰기만이 사랑받는다



오래 전 신문에 동시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생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긴한데 동생과 싸운 내용을 쓴 거 였다. 수업 시간에 꽃에 대해 동시를 써보는 거였는데 자신을 '꺾이는 꽃'에 비유했다. 총평을 했던 시인도 솔직하게 잘 쓴 글이라 소개한다고 했다. 또 자신을 '꺽이는 꽃'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라고도 했다. 

동생이 계속 깐족대고 귀찮게 하기에 참다 못해  한대 때렸더니 동생이 울기시작했다. 급기야 엄마한테 '너는 가만히 있는 동생을 왜 울리냐"며 한대 얻어터졌다며, 얻어맞는 "나는 꺾이는 꽃과 같다"고 표현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도 '꺽이는 꽃'은 내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도 '살아남는 글'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구독자 수가 많고 100만 뷰를 돌파한 작가들을 보면 부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도대체 어떤 글이 살아남아서 독자에게 회자되는 걸까. 어떻게 써야만 생명력이 긴 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글쓰기와 관련된 책을 가까이하게 된다.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은 '혼을 담아내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설명하는 힘에 대해, 독자에 대한 경의에 대해, '바보의 벽' 글쓰기의 함정에 대해, '손이 닿지 않은 광맥'과의 만남에 대해 '읽고 있는 나'와 '다 읽은 나'의 만남에 대해 등 등 글쓰기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 즉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전한다. 저자의 '혼을 담는 글쓰기'는 '울림이 있는 언어', '전해지는 언어', '신체에 닿는 언어'로의 글쓰기를 의미한다. '혼에서 나온 언어'는 '산 것에서 태어난 언어'라고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글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살아서 전해지는 글도 있지만 나옴과 동시에 사라지는 글들도 부지기수다.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살아남는 글은 도대체 어떤 글일까 하고. 어떻게 써야 독자에게 의미부여를 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누군가는 말한다. 작품을 쓰지 말고 제품을 만들라고. 독자들의 마음을 얻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제품 같은 글을 쓰라고 한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글이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독자에 대한 경의', 이를테면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직접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글쓰기만이 살아남음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수십 년에 걸쳐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신물 날 정도롤 다양한 글을 읽고 또 스스로 대량의 글을 써온 결과, 나는 '글쓰기'의 본질이 '독자에 대한 경의'에 귀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25쪽


살아서 '전해지는 언어'에는 발언자의 '전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어있다.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란 그 무엇을 기어코 전달하고야 말겠다는 절박함을 기반으로 한다.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언어만이 전달된다.  "사랑이여 어디든 닿아라"처럼 간청의 언어만이 뜻하지 않은 곳까지 닿게 한다. 창조적 언어활동인 '혼이 담긴 글쓰기'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언어가 폭주하며 겹쳐지면서 화음을 이루는 글쓰기를 하라고 부추긴다. 그는 풍부한 내적 타자를 갖추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해 나가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독자에게 '경의를 담은 글쓰기'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 가장 창조적이 됩니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35쪽


글쓰기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소진하고 몸을 혹사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새로 일일이 굴을 깊이 파야한다"는 하루키의 의견을 끌어와 주장을 펼친다. 나 역시 창작이란 신체적 실감이 함께한다고 피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입장에 동의한다.


잘 알려진 바대로 하루키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씩은 규칙적으로 쓴다고 한다. 글이 잘 써져서 좀 더 쓰고 싶더라도 거기서 멈추고, 글이 안 써질 때도 어떻게 하든 20매까지는 꾸역꾸역 써서라도 그날의 분량은 해낸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글이란 머리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체적 노력까지 동반될 때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 린다든지,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든지 하면 규칙이 깨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150쪽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오죽하면 100권 읽는 것보다 책 한 권 써보라는 말이 있을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글을 씀으로써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인 메타 인지가 가능하다. 


마음을 담은 글쓰기란 '지하실 밑에 있는 지하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이다. 마음을 담은 글쓰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합격 최저선 정도만 넘길 정도의 글쓰기에 익숙하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독자에 대한 경의를 담은 글쓰기' 말하자면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글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렇게 쓴글은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독자에게 사랑받는 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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