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나의 슬픔에 공감해 줄 사람은 없는 것인가
지난 구정 명절 때의 일이다. 아들 내외가 명절 음식 준비한다고 하루 전날 점심때쯤 도착했다. 음식 준비래야 전 부칠 거 조금 사고, 명절 때 먹는 다른 음식들은 대형마트 반찬 코너에서 해놓은 것들을 사서 옮겨 오는 것에 불과했다.
서울 토박이인 나와 달리 시골 출신인 남편은 음식을 아주 뻑적지근하게 차리는 걸 원했다. 옛날부터 명절날에는 집안에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진동해야 복이 온다는 둥 이상한 논리를 펼쳐왔었다. 그래 왔던 것을 나와 며느리도 일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내세워 간소화해 버린 지 오래다
밖에서 일을 하는데 명절날 집에서까지 나도 일하기 싫어요. 게다가 다른 사람이 노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더더욱 싫어요. 그러니 추억 정도로만 삼게 음식은 되도록이면 간단하게 하고 가족이랑 함께 노는 데 시간을 씁시다. 며느리가 시댁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야 우리 아들 마음도 편하니까요.
평소 같으면 씨알도 안 먹혔을 얘기가 '그래야 집에 오는 아들 마음이 편하다'는 데에 남편은 그만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양보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놈의 전이었다. 전! 먹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전이었다.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남편은 최소한 서 너 가지 정도는 하고 싶어 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해서 옛날 시골에서는 배추전도 했네, 연근전도 했네, 들어보지도 못한 여러 가지 전들을 읊어댔다. 동태전, 동그랑 땡, 쇠고기 전, 삼색 꽂이, 녹두전 등 등 남편의 부치고 싶은 전은 끝이 없었다.
동그랑땡은 재료를 다 준비해 놓은 것으로 사고, 동태전 대신에 크기가 좀 커서 부치기가 수월한 대구전으로 바꾸고, 쇠고기 전은 쉬우니까 그냥 하고, 삼색 꽂이는 둘째가 좋아하니 그것도 사 오려고 했다. 그런데 삼색 꽂이는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는데 무게가 많이 나가서 그런지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다. 첫해는 삼색 꽂이도 만들긴 했지만 그것도 시간 많이 걸린다고 그다음 해부터는 아예 생략해버렸다. 지금은 동그랑땡이랑 쇠고기 전이랑 동태전이나 대구전 둘 중의 하나로 세 가지 정도 하고 있다.
남편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이번 명절의 떡국 국물은 닭발을 고아서 육수를 만들겠다고 했다. 닭발 육수가 진짜 고소하고 맛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명절 전날 음식 준비한다고 들어오는 아들한테 남편의 요리 특강이 시작됐다.
이번 떡국은 내가 준비할 거야. 내가 잘 나가는 음식점 사장님한테 알아 온 거야. 기대하라구. 집안으로 들어오던 아들이 물었다. 떡국 육수 만드는 특별한 비법이 따로 있어요?
그럼. 먼저 닭발을 푹 고아서......
아들은 먼저 들어오고 주차시키고 오느라 며느리는 아직 집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아들이 며느리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잠깐만요, 아빠. "응, 경비실에 말하고 차 대면돼!"
전화가 끝나자 이어서 남편이 다시 말을 했다.
그걸 그냥 고아서는 안 돼. 거기다가 냄새를 없애는......
아빠, 잠깐요. "아니 우리 지정 주차하는 곳에다 대면돼."
아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요리 비법 전수가 이어졌다.
그 냄새 없애는 것이 진짜 비법인데, 냄새 안 나게 하는 약초를......
전화가 다시 울렸다. "어. 나보고 경비실로 전화해달라고?"
아들이 전화에다 대고 며느리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말했지. 아, 맞다. 약초! 그 약초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말이지
전화가 또 울렸다.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보고 현관으로 나오라고? 알았어."
곧이어 아들 내외가 같이 들어왔다.
요리 비법을 전수하지 못한 남편이 주방 한 귀퉁이에 머쓱하니 서 있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다 하지 못한 남편은 시무룩하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편의 요리 비법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우두망찰 서있던 남편을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짠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얼른 쫒아 들어갔다.
당신이 아들 며느리한테 특별한 요리 비법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구나. 영양가 있는 이야기인데 귀한 얘기를 아들들이 못 들었네. 걔들이 복이 고것밖에 안 돼서 감로수 같은 당신 얘기를 못 들었네.
하면서 그래서 그 비법이 뭔데요. 너무 궁금하네. 그다음 얘기 좀 해봐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김 빠진 맥주가 되어버려서인지 말할 의욕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됐어. 얼른 나가서 애들하고 일 봐. 하곤 TV 리모컨을 이것저것 눌렀다.
흥이 꺾인 남편을 보며 오래전에 읽었던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우수>가 생각났다. <우수>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할 길 없는 인간의 비애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마부인 주인공 요나 포타포프는 생때같은 아들을 이번 주에 잃었다. 훌륭한 마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들이었다. 건강했던 아들이 열에 들떠 앓다가 그만 병원에서 사흘 만에 죽어버린 상태였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저세상 사람이 됐다.
말 그대로 슬픔에 빠진 요나는 돈을 벌려는 의욕조차 잃어버린 채 떨어지는 눈을 유령처럼 맞고 있다. 마차에 탄 첫 번째 손님인 군인에게 "나리...... 제 아들놈이 이번 주일에 죽었답니다."라고 말하자 "으흠...... 어떻게 죽었지"라고 물을 뿐" "이래 가지곤 내일까지도 못 가겠다. 좀 더 몰아봐!"라고 재촉을 한다. 그다음 손님인 꼽추 일행 세 명에게도 "이번 주일에...... 제 아들놈이 죽었습니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들은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야......"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숙소로 돌아와 자다 일어난 젊은 마부에게도 말해보지만 그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을 뿐이었다.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지만 자다 일어난 젊은 마부는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누구든지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혼자서 외로이 생각에 잠겨 아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이 괴로운 것이다.
결국 요나는 마구간으로 가서 말에게 이야기를 한다. 자, 먹어, 먹어...... 귀리 값을 못 벌면 건초라도 먹어야지...... 그래...... 마차를 끌자니 이미 몸은 늙어 버렸고..... 아들놈이 끌어야 해. 내가 아니라......
그 앤 참 훌륭한 마부였어. 그놈만 살아 있다면...... 요나는 잠시 가만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 얘야...... 꾸지마 요느이치는 이 세상에 없다...... 먼 곳으로 떠나갔어. 아무 산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 자, 네게 새끼 말이 있고, 넌 그 새끼 말의 엄마라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그 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슬프지 않니? 말은 먹이를 씹으며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주인의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한다...... 요나는 흥분한 어조로 자기의 자초지종을 말에게 이야기한다.
마부 요나가 바란 것은 단순히 말을 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듣는 상대에게 자신의 슬픔을 말함으로써 상대가 함께 슬퍼해 주기를 원했다. 더 나아가 상대로부터 위안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부 요나의 슬픔에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슬픔을 위로받고자 했던 요나의 소박한 바람은 주변의 무관심으로 인해 무참히 깨어진다. 충분히 애도할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한 마부 요나의 슬픔은 인간 심연의 '우수'를 보여주고 있다. 요나가 자신의 슬픔을 이겨내는 행위는 기껏해야 자신의 말한테로 가서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는 것뿐이다.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언어의 온도 말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참, 지난번에 당신이 전수시키고 싶었던 그 특별한 닭발 육수에 대해 자세히 말 좀 해봐요. 아들들이 못 들었으니 나라도 배워서 떡국 좀 맛있게 끓여보게요.
이렇게 말을 해도 두 번 다시 닭발 육수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식어버린 언어의 온도는 유통기한이 다 되어 생명력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하고 싶은 말을 끝내 다하지 못한 남편이 그날따라 유독 측은해 보인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