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수 없는 비밀, 완곡어법은 누가 쓰는가
완곡어법은 언제, 어떻게 사용되는가.
흔히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완곡어법'의 대상이 된다.
'노인'에 대한 완곡어법은 사용되는 시대에 따라 용어를 다르게 표현했다. 나이 든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노인', '노년', '황혼'이라고 했다가 '실버'라는 말로 통용됐다. 아마도 노인이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연세가 높으신 낯 모르는 어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어르신'도 있다. "원래는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는데, 요즘에는 '노인'보다는 격이 높다는 느낌을 주어 많이 쓰이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노인은 '상급', '손윗사람', '연장자' 등을 뜻하는 '시니어'로 부르고 있다. "노인은 '시니어'로 불리길 좋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아무튼 비유적인 표현을 하든, 서구적인 용어로 차용을 하든 특정한 사회적 범주가 '완곡어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우 주변부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 더딘 노인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노인은 상당 부분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상실과 저하를 동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외된 노년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노인이라는 사회적 범주는 점점 왜곡되고 비하되고 있다.
풍요로움'과 '고급스러움'의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가 대다수의 노인을 초라한 노인으로 투사하면서 타자화시키고 있다.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앞장서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노인을 근대적 지식과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시킴은 물론 세련되지 못한 태도 등을 들어 타자화 하는데 공헌한다. 대중매체가 타자화된 노년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유포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화적인 강박관념과 궤를 같이 한다. 아울러 차별화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대중매체에 나타난 노년에 관한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힘든 노인들의 처지를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력이 부족한 노인들을 출연시켜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인들을 연민이 아닌 비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노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킨다. 그동안 노인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심의 소외된 노인이거나 농촌에 홀로 남은 노인들에게 사용되었다. 이제는 주변화된 노인들, 달리 말하면 사회적 위치에서 배제되어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된 익명의 노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산되었다. 이에 비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은퇴한 유력인사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서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노인’으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노인에 대한 거리두기는 사회뿐만 아니라 노인 자신들에게도 나타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노년』이란 책에서 “나이 듦은 내가 아닌 타자로 인식하는 것”이며 “내 마음은 아직 젊은데”라는 의식은 노화를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내가 아닌 타인의 가면을 쓰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나부터도 법률적인 나이보다 훨씬 더 젊다고 생각하고, 언제든 노력하면 젊은 시절의 몸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노인 스스로도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젊음의 매력에만 가치를 둔 사회문화 속에서 노년은 점점 타자화되고 주변화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년의 범주에 속하는 사회적인 나이로 인해 때로는 자신감이 결여되기도 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늙은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이러다 보니 노인층을 상대로 한 문화산업에서는 주로 활동적이고 쾌활한 노인을 등장시킨다. 중년을 끝없이 연장하는 이미지들을 생산하며 유포하고 있다. ‘중년의 연장’으로서의 노년의 이미지가 상품화되면서 노년의 세대들을 자극하고 있다. 미디어는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한다. 어서 빨리 이 제품을 사용해 젊음을 유지하라고 속삭인다. 이들은 ‘젊은 노인’의 이미지를 노년에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매력적인 목표로 부추기고 있다.
언뜻 보기에 대중매체가 바람직한 노년의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듯 보여도 사실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중년을 끝없이 연장함으로써 젊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늙음의 과정을 겪는다. 늙는 것에 대한 생각을 애써 잊어버리고 감춘다고 해서 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쇠락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추방한다고 늙음 또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꿈이 기껏 육체적 기능의 유지에만 매달리게 하는 이 시대의 현실이 서글프다.
하지만 노인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있다.
“노년 차별이란 노년과 노화를 두려워하는 사회의 두려움과 공포를 숨기기 위한 집단 심리의 표출”이라고 규정한 노인 정신과 의사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노화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흘러가는 시간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들을 차별하는 이 사회의 젊은이도 시간의 차이일 뿐 예외 없이, 평등하게 차별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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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는 완곡어법을 동원해 노후 생활의 여유로움과 세련됨을 표방하고 있다. 닿을 수 없는 젊음을 예찬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주관을 갖고 실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성찰할 때에 젊음이 지닌 진정한 젊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죽을 가능성만 남겨놓은 채 아무런 미래가 없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듦으로써 진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람은 오래 살지 않고는 오랜 경험을 할 수 없고 지혜롭기 어렵다”는 말처럼 살아낸 많은 일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만이 현명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은, 삶을 모르고 늙는 늙은이이다.”라고 니체가 말했듯이 나이가 드는 것을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 듦의 미덕”도 있지 않은가.
“노년의 비극은 노년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젊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신체적으로 젊은데도 배제하는 이 사회가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보다는 오히려 책의 원제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정곡을 찌르는 이유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젊음을 상징하는 ‘청춘’은 어떤 특정한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사무엘 울만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청춘이란 깊은 샘물에서 나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 된 노인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라고 했다
종종 사회는 호명을 함으로써 호명하는 대상을 분석하고 때로는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호명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 집중해서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동으로써 개개인의 삶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어머니 릴리안 여사는 68세에 평화봉사단 훈련을 마쳤다고 한다. 68세 훈련을 마친 것도 대단하지만 봉사하는데, 나이는 문제 될 것이 없다며 노인들을 격려하면 산 세월 또한 대단하다.
노인을 폄하하는 우리 사회에서 릴리안 여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오늘 다시 새롭다. 오늘을 가슴 설레는 체험으로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