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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08. 2020

당신이 안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래터링,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라는 레터링이 뜨면서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AS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의 전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복’이란 단어가 뜰 때마다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행복을 권하는 거지, 또 행복하세요란 말이 어법이 맞는 거 이기는 하는 걸까?      


마침 학원에 있던 민지에게

“‘행복하다’는 형용사라 명령형을 쓸 수가 없는데 ‘행복하세요’라고 명령형을 쓰는 건 좀 그렇지” 했더니


      

문법적으로는 안 되겠지만 그냥 관용적으로 쓰는 거 아닐까요.
근데 저, 지금 수학 문제가 안 풀려서 무지 불행하거든요. 하면서 문을 닫았다.      


행복이란 단어는 주변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낯 모르는 사람들한테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와 같은 문자를 자주 받고 있다.        


행복, 행복! 모두들 행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행복 공화국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행복바이러스에 감염을 넘어서 취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크 ~ 행복주식회사도 있네!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37760


고등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왠지 행복은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대접해줘야만 될 것 같았다. ‘행복’을 이렇게 남발해 가면서 가볍게 취급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행복에 대한 심오한 뜻이 있을 거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행복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다가가 뭔가가 있을 거 같아 찾아낸 논문이 바로 박찬국의 「목적론적 입장에서 본 행복」이었다. 이 논문에는 행복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맞아, 고차원적인 인간이 행복에 대해 이 정도는 언급해줘야지 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논문의 서두에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인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d)'란 개념과 행복에 대한 현대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비교해 놓았다. 현대인들이 행복을 물질적인 것을 통해 느끼는 안락함이나 단순한 쾌감으로 동일시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발휘하여 완전하게 실현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보았단다. 이성이 온전히 구현된 상태를 덕이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구현된 상태가 바로 행복이라고 했다.     

  

읽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행복보다는 더 멀리 고차원적으로 넘어갔다. 지적인 허영심이 그만 과해서 너무 멀리 나가버렸다.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지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80122.010180750110001


저녁 먹기에는 이른, 때늦은 오후에 문제가 안 풀려서 불행하다는 민지 남매랑 왕뚜껑에다 치즈 두 장씩을 얹어서 땀을 뽈뽈 흘리면서 먹었다. 치즈 한 장 넣을 때랑 두 장 넣을 때의 고소함이 달랐다. 컵라면에도 품격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으면서 아 ~ 너무 맛있어. 너무너무 행복해요. 탄성을 지르면서 좋아했다. 좀 전의 불행하다는 그 표정은 어디에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게 먹는 경험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먹는 즐거움은 좀 더 강한 쾌감으로 바뀌어 뇌에 기쁨으로 작용했다. 말하자면 행복이 인간을 생존하게 한다는 진화론적 행복론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행복이 품격이 있었다면 서인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은 진화론적 심리학으로 접근해 본능적인 성격이 강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을 갖춘 인간이면 행복도 좀 더 있어 보이게 심오한 뜻을 갖고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생존을 위한 감정이라고 일축해버린다. 행복은 생각이 아닌 경험이라고 선언한다.    

  

『행복의 기원』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서인국 교수는 ‘왜’에 주목을 했다. 왜 행복해야 하냐 하면 생존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감정이 필요하단다. 행복은 관념적인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일 뿐이고, 지극히 일상적인 즐거움이 누적될 때 생존을 지속하게 된다.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유전자를 복제해서 재생산하는데 목적을 둔다.  

     

행복한 느낌 즉 쾌감에는 음식과 사람이 필요하다. 먹을 때의 쾌감은 사냥이나 농사를 짓거나 다른 일련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만든다. ‘적응에 의한 초기화’라고 해서 처음 사냥했을 때의 쾌감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초기화되어 쾌감이 소멸된다. 그래서 다시 사냥을 나가게 된다.      


행복에 필요한 것이 사람임을 페르시아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는 13세기에 이미 간파했다. 당신이 오시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당신’에게 목을 맸다. 그 절절함으로 아직도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고 있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와인이 있어요
당신이 오시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

  

당신이 오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https://blog.naver.com/farifari1235/221611722681


성공을 해도 축하해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몇 년 전 남편 친구들이랑 라이브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이른 저녁이어서 그런지 우리 일행이랑 여성 두 분만이 있을 정도로 카페 안이 한산했다. 남편 친구들이랑 있는 것도 어색해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분들끼리 온 팀에서 키 큰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신이 미국에서 왔는데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했다. 자축하고 싶다며 오늘 술값을 자신이 다 낼 테니 축하를 해달라고 했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고 있는 새에 어느 틈에 우리 쪽으로 성큼 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오래전에 이민을 가서 한국에는 가족도 없고 친구 하나 달랑 있어  너무 외로워서 그렇다고 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같이 먹고 마시자고 했다.     

 

어정쩡하게 있는 사이 남편 친구 중에 넉살 좋은 사람이 나서더니 금방 통성명을 하고, 공통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남편 친구는 신당동에서 자랐는데 이 여성도 신당동 출신이라고 했다.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 타고 핫쵸코 사 먹고 군만두 먹던 얘기를 하더니 금방 친해졌다. 그때는 참 이상한 여자도 다 보겠네 했는데 『행복의 기원』을 읽으며 많은 부분 이해가 됐다. 축하할 사람이, 함께 할 사람이 빠져 있으면 외로움이 더 크다는 것을.     


이 책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스탠퍼드대학에서의 특강을 하게 됐다. 교과서에서 이름으로만 봤던 심리학자들이 잊을 수 없는 덕담을 해주어 가슴 벅찬 경험을 했다. 하지만 함께 기쁨을 누릴 사람이 없었다. 함께 나눌 사람은 없고 화분만 있는 "당신이 오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의  그 상황이다.

     

일정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며칠간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뭔가 학자로 업그레이드되는 듯한 벅찬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 무척 외로웠던 때로 기억된다. 기쁨을 당장 ‘나의’ 사람들과 떠들며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먼 이국땅의 텅 빈 공항에서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압도됐다. 책상 위 화분과 승진 파티를 하는 느낌이었다.                                                                                                                                                                                                                         - 『행복의 기원』중 94쪽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행복하게 사는 거 어렵지 않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거 먹는 경험을 자주자주 하면 된다.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횟수를 늘려야 한다. ‘적응에 의한 초기화’로 쾌감이 금방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행복이라도 적응으로 인해 행복하기 이전으로 리셋이 되어 버린다.  빈도수를 높여 작은 행복이라도 자주 느끼며 생존해야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고립은 사람을 고독하게 외롭게 만든다. 심지어 죽음까지 연결될 수 있다. 왜 있지 않은가? 동물의 왕국에서도 보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외톨이들이 공격을 받기도 싶다는 것을. 외톨이들은 생존은커녕 번식까지 위태롭다.      


타인은 지옥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그 타인인 ‘사람’이 행복을 만드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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