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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16. 2020

<엘비라 마디간>에 스며든 모차르트

가난 속에서 성공을 꽃피우려면 의지력보다는 환경 설정부터

떡볶이는 힘이 세다     


코로나로 학원이 잠잠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3 학생들만 그냥저냥 변동 없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 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한데도 코로나를 뚫고 찾아온 아이들이 기특해서 비장의 장기를 발휘했다. 바로 음식 만들기이다. 떡볶이를 부지런히 해서 대령을 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제대로 밥은 먹고 왔는지가 신경이 쓰인다. 아이들을 보면 숙제 검사부터 해야 하는 데도 “밥은 먹었니?부터 묻게 된다.

      

아이들 간식 준비를 수십 년째 하다 보니 이제 떡볶이 장사를 해도 될 정도로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치전도 수준급이다. 주말농장에서 배추를 갖고 와 김장을 넉넉히 해둔다. 겨울 내내 김치전을 만들어 먹인다. 토요일 같은 날은 심지어 스무 장도 만든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안 오고 있다 보니 김장 김치가 제 할 일을 찾지 못해 심심해하고 있는 중이다.  

  

아! 심심해~~ 내가 할 일을 못하고 있어. 코로나야, 빨리 좀 물러가라!  http://daedokimchi.kr/goods/goods


쉬는 시간에 아이들 수대로 계란을 삶고 치즈까지 얹어서 떡볶이를 만들어 줬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여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성적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는 과학중점학교라 과학고를 준비하다 떨어진 속칭 ‘과떨이’ 들이 몰려 있어 내신 따기가 엄청 어렵다.

내신 1.9등급만 나와도 S대 의대는 가고 2점 초반대만 나와도 스카이는 충분히 갈 정도로 실력 있는 아이들이 몰려있다 보니 특목고 못지 않게 경쟁이 치열하다.       

      

혜진이는 중학교 졸업할 때 국회의원 상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탁월했다. 하지만 과떨이들이 몰려 있는이곳에선 중학교 때의 성적을 유지하기가 정말 힘들다. 늘 안달하면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며 유전공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에 비해 애리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온 친구라 영어에 아주 능통하고 국어 또한 잘한다. 소아과 의사가 꿈이라 의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떡볶이를 먹어 배도 불러서 그런지 아이들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늘 조바심을 내던 혜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떡볶이 떡이 없어서 떡국 떡으로 대체했다



애리야 난 지금 용의 꼬리가 되는 것이 좋은지 닭의 머리가 되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고 있어. 용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난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다른 애들처럼 아예 노선을 바꿔 탈까 생각 중이야. 용감하게 내신 포기하고 정시로 달릴까  

   

가만히 듣고 있다가 혜진아,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거래” 했더니 ‘아유 그런 아재 개그 말고요’ 하며 말을 잘랐다.  언제나 대답할 때 뜸을 들이는 애리가


~ ~ ~ 나는 용의 꼬리가 되는 편을 택하겠어. ~ 아무래도 용이 있는 곳은 그들만의 문화가 있지 않겠어. 꼭 학교 브랜드를 봐서가 아니라 꼬리가 되더라도 S대를 가서 그곳의 문화를 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 내 생각엔 거기서 더 많은 성장을 하게 될 것 같아. 비록 수능점수가 낮은 과를 가더라도 특출 난 사람들이 모인 학교니까 경쟁이 당연시되는, 그런 특별한 문화를 경험하지 않겠어.    

  

순간적으로 잠시나마 애리의 이야기에 동조가 되었다. 그래서 학원 다녔던 선배들 얘기를 하며

‘그래도 E대 간 애들은 소개팅도 S대 애들이랑 하나 보더라. 했더니 혜진이가 시니컬하게

     

S대 사람들이 E대 여학생들이랑 만나준대요?    

  

그러자 애리가 “만나주지. 왜 안 만나주겠어. 여대에선 거기가 최고잖아.”   

  

애리의 “특별한 곳에 소속되면 그곳 문화에 맞게 성장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소셜 애니멀스』의 에리카가 떠올랐다. ‘관계와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부제답게 해럴드의 부모님인 롭과 줄리아의 만남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중산층의 자녀인 해럴드는 가난한 가정에서 빠져나온 에리카와 결혼을 해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한 가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에리카'이다. 에리카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 마리화나와 알코올 중독으로 찌들어 사는 엄마와 툭하면 집을 나가서 마음 내킬 때 들어오는, 책임감이라곤 찾아볼래야 볼 수도 없는 가정이라고 이름붙이기도 애매한 집에서 자라났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에리카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사회적 지위까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저자는 ‘사회적 유동성’에 대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한다.       


사회는 ‘예기치 않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속성’을 지닌 창발적 체계이다. 무엇이 가난을 불러일으키는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다. 그래서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을 개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고 믿은 교육 개혁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세운 고등학교 과정이 ‘아카데미’이다. 이 과정을 통해 개인은 변화되고 변신이 가능했다. 이러한 기회는 에리카처럼, 『힐빌리의 노래』의 밴스처럼 ‘학습된 절망’에서 벗어나게 한다.  

    

『힐빌리의 노래』의 밴스는 해병대 입대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하게 된다.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취침하는 스케줄, 엄격한 자기 관리를 강조하는 해병대의 문화가 밴스를 바꾸었다면 ‘아카데미’의 문화가 에리카의 성장을 도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불우한 환경에서 더 나은 환경으로 진입해 사회적 유동성의 사례로 증명하고 있다.


가난 속에서 성공을 꽃피우려면    

 

에리카는 자신이 처해 있는 곳이 싫다고 스스로 주입시켰다. 벗어나려고 했으며 싫지 않은 이웃을 미워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의지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해 다른 환경을 설정했다. 환경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신호가 작동해 결국 신분 상승이라는 효과를 누리게 됐다.       

에리카는 불행한 자신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 ‘아카데미’ 입학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이 학교에 정말 들어오고 싶어요. 열 살 때 새희망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입학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사에게 말했는데,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열세 살입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성적도 좋습니다. 모범적인 품행이 어떤 건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하교에 입학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시면 압니다. 신원보증인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가르친 교사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  『소셜 애니멀스』176쪽  


추첨이라는 공정한 방식이 있다고 거절하는 ‘아카데미’ 설립자에게 에리카는 가지 않고 그냥 서있기만 한다. 이를 본 뚱뚱한 남자인, 해지펀드 자산운용가이며 학교의 기부자는 설립자들에게 메모한 종이를 건넨다.

     

“부정 추첨 한 번 합시다, 젠장!”      


‘아카데미’는 에리카의 인생을 바꾸는 기회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빈곤의 문화’에 물들어 있던 그녀에게 ‘아카데미’ 설립자들은 학습만이 아닌 ‘새로운 문화’ 그 자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집중적인 학습과 독서는 물론이고 주류 사회에서 행해지는 예의범절과 태도를 익혔으며 방과 후에는 상류층들이 향유하는 고급의 문화인 악기를 연주하고 테니스와 같은 스포츠를 배웠다. 뿐만 아니라  역할 모델이 되어줄 주요 인사들과의 만남을 갖는 기회가 주어졌다. 에리카는 이를 놓치지 않고 거머쥔다.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탄다.  마침내 주류 사회로 진입해 유력 인사로 성장하게 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TED 강연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음악 천재가 된 것은 타고난 재능 때문이 아니란다.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고 설파한다. 중요한 것은 지능이나 재주가 아니라 단련이다. 자신을 단련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아카데미’에서 익힌 문화처럼, 해병대에서 터득한 문화처럼 누추한 현실에서 더 좋은 환경으로 나아가는 사다리를 발견하도록 한다. 이러한 문화에 몸담고 있다 보면 고3 애리의 말처럼 정신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성장하게 만들 것이다.      

 

에리카처럼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연주할 순 없어도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클래식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지금처럼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게 된 까닭은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덕분이다. 당시의 음악 선생님은 로맨티시스트여서 주말이면 사모님과 영화를 보시곤 했다.  

    

https://movie.naver.com/

그날도 <엘비라 마디간> 영화로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언변도 좋으셔서 우리들에게 마치 영화관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두 아이의 아빠인 젊은 장교 '식스틴'은 전쟁의 회의감으로 탈영을 하고 줄 타는 소녀 '엘비라'는 부모와 서커스를 버리고 도주를 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닥친 이들은 마지막 소풍을 떠나게 된다. 엘비라가 나비를 쫒아가는 장면에 화면은 멈춰지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영화 중간중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흘러나오는데 선생님께서는 감탄을 하며, 때로는 탄식을 하며 맛깔스럽게 영화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당시로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몇십 곡 들려주고 방송으로 곡명과 작곡가 이름을 쓰는 시험을 봤다. 기억으로는 <신세계 교향곡>과 <1812년 서곡>과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정도 등이 나왔던 것 같다.


이렇게 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니까 억지로라도 클래식 음악을 즐기게 됐다. 50 여곡을 시험으로 나온다고 해서 열심히 듣다 보니 웬만한 것은 첫 소절만 들어도 제목을 말하는 수준이 되었다. 내친김에 기독교 방송의 6시에 하는 퀴즈로 음악을 맞추는 ‘다이얼 Y를 돌려라’에 참여하려고 오빠랑 클래식 음악을 정말 열심히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습관으로 지금은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혜진이는 강 건너 하나가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는 거냐며 좀 더 일찍 공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곳은 4학년부터 특목고 준비를 하는 데 자기가 살던 곳은 6학년까지도 마음껏 뛰어노는 문화여서 공부할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학원 뺑뺑이를 돌려서라도 실력을 쌓게 하겠노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련된 아이들을 따라잡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거라며, 일찍부터 단단하게 훈련시켜 경주마를 만들 거라고도 했다. 혜진이는 끊임없이 단련하여 임계치를 넘은 아이들을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에리카의 눈부신 성장을 보며 또 혜진이의 아쉬움을 바라보며 재산이 아닌 문화를 남겨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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