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시, <순서>가 가르쳐 준 비밀

by 진순희


"노란 기침"과 나의 우둔한 커서


안도현의 시 「순서」를 읽다가 '노란 기침'이라는 대목에서 명치끝이 결렸습니다. 겨우내 입을 다물고 있던 생명력이 도저히 참지 못해 터뜨리는 첫 비명 같은 거였지요.


그런데 요즘 제 모니터의 창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왜 내 프롬프트는 꽃을 피우지 못할까?"


타인의 SNS에 올라오는 화려한 시네마틱 영상들을 보며 지독한 마른 기침을 해댔습니다. 마음이 너무 앞선 탓에 생긴 속앓이였습니다. 매화가 길을 열기도 전에 사과나무의 결실부터 훔쳐보고 싶었습니다. 정작 내 마당에 씨앗 뿌리는 수고는 생략한 채, "열려라 참깨" 한 마디로 남의 보물창고를 통째로 얻으려 했던 알리바바의 도적 같은 심보 때문이었습니다. 비겁한 조급함이었지요.





'튀밥'의 시간을 건너뛰려는 자의 추락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기 위해선 대지의 온도를 견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차갑던 흙이 온기를 머금고, 그 따스함이 뿌리를 타고 줄기 끝 꽃눈에 닿아 스스로 몸을 열 준비를 마쳐야 비로소 꽃은 피어납니다.


하지만 제겐 그 정직한 기다림을 참아낼 인내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생성 버튼 하나만 누르면 마법처럼 명작이 쏟아질 줄 알았죠. 땀 흘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손에 넣으려다 보니, 마음만 바빠 늘 발을 동동 구르며 앞서 나갔던 것입니다.


영상은 이미지 한 장의 운이 아니라, 수십 번의 정교한 스토리보드가 쌓여야 비로소 움직이는 생명력을 얻는 법입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성, 빛의 흐름을 설계하는 그 지루한 '매화의 시절'을 자꾸만 건너뛰려 했습니다.


영상 AI에 필요한 프롬프트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시간의 서사여야 했는데,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덜 달궈진 가마솥에 쌀을 집어넣고 왜 튀밥이 되지 않느냐고 가마솥만 걷어찬 꼴이었지요.





"나도 질세라"라는 시샘이 아니라 다정한 손짓이었다


시의 끝자락, 탱자 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는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예전엔 이것이 먼저 피려고 안달복달하는 욕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AI 영상이라는 낯선 파도 앞에 서보니 알겠더군요. 이건 시샘이 아니라, 앞서 핀 꽃들이 "이제 네 차례야, 겁내지 마"라고 등을 밀어주며 건네는 다정한 손길이었다는걸요.




사실 제가 AI 세계에서 마주한 절망은 아주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매화처럼 단단한 기초 서사가 먼저 뿌리를 내리고,
산수유처럼 간질간질한 컷 구성이 기침처럼 터져 나와야 하며,
조팝나무처럼 수만 번의 프롬프트 수정이 튀밥처럼 튀겨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만의 사과꽃 같은 영상이 열리는 법이지요. 남의 집 앞마당에 핀 화려한 결과물만 훔쳐보느라, 내 모니터 속 커서가 내뱉는 소중한 '첫 번째 기침'을 구박만 했던 시간이 미안해졌습니다.



꽃 피는 순서를 어긴 적 없는 자연처럼, AI 영상도 집요한 설계의 순서를 먹고 자라는 참 정직한 녀석이라는 걸 뒤늦게서야 배웁니다.





펑펑, 팡팡, 나의 렌더링이 끝날 때까지



이제는 남의 영상 속 화려한 불꽃놀이에 한눈파는 대신, 내 스토리보드 한 칸이 가진 무게를 응시합니다. 안도현 시인이 목격한 봄꽃들이 한 번도 순서를 어기지 않았듯, 저의 서툰 영상들도 결국은 정직한 배움의 순서에 따라 피어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형체도 알 수 없는 노란 기침만 연신 해대는 산수유의 시간일지라도 괜찮습니다. 이 기침이 잦아들면 곧 하얀 튀밥 같은 장면들이 터질 것이고, 그다음엔 누군가에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 피어날 테니까요.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가장 찬란한 것은 늘 마지막에 피는 법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 책이 나왔습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80937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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