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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26. 2020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

삼식이가 제일 두렵다

말들이 무성하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되다 보니 말, 말, 말들만이 무성하다. 

오늘도 동창들이 모인 카톡방이 아침부터 부산했다. 심심하다 못해 일상이 지루해지고 있어서 그런지 유머글들이 춤을 춘다.       


첫 번째 이야기

자가격리를 한다면 누구와 할 것인가요?

보기 1번 와이프와 아이들..

번호 2번 했더니 듣지도 않고 2번 무조건 2번 하니까 

.. 표정이 너무 진지하게 2번 

저 사람 자가격리 사형수랑 한방에 넣어야 해 ~~

누군지 듣지도 않고 2번 ㅋㅋ     


친구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세계 어떤 나라도 와이프랑 애들이랑 2주 동안 함께 하는 건 지옥인가”보다고 했다.      


두 번째 이야기

살림을 똑소리 나게 잘한다고 정평이 난 친구는 “우리 딸은 큰애 밥 3번 주기 힘들어서 방을 깜깜하게 해 놓고 늦게 일어나게 한단다. 요즘 젊은 엄마들 힘들어 죽어.”     

듣고 있던 음식 잘하는 다른 친구는 “요즘 코로나보다 삼식이가 더 무섭다더라. 이러다가 두식이도 무서워질까 봐 겁나.”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평소 주변에 일어나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친구가 말했다. “우리 이 참에 두 끼 먹기 운동해볼까? 재정적, 시간적, 심리적으로 이득이 많은데..”     


듣고 있던 뉴질랜드 친구는 풀 죽은 태도로 글을 올렸다. “4주 칩거 들어가네. 동네도 고속도로도 적막강산이네. 말 잘 듣는 뉴질랜드 사람들, 확진자 늘어나면 락다운 연장된다는데. 서울 가는 길은 기약이 없네.....    

교사들 카페에도 웃픈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코로나 방학 생활 규칙!>에 지켜야 할 항목이 다섯 가지나 있는 데, 위 사항을 어기면 피가 코로 나올 것이다. 

아마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사진을 올렸나 본데 모두들 “웃프네요”라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코로나로 자발적인 ‘위리안치’의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또 누군가는 비통함으로 이 사태를 바라본다. 한탄하는 사람들은 진즉에 가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가볼 걸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꼭 이번이 아니어 다음이 있으니까 다음으로 미뤘던 것인데 그게 제일 애통한 가보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이제 하고 싶은 것은 미루지 않고 내 기어이 가리라 다짐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두려움에 대하여     

 

비통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문제는 두려움의 감정이다. 우리는 언제 두려움을 갖는가?

두려움이란 대상이 없는 불안과 달리 대상이 있으며, 두려움의 원인은 스스로 두려워하는 현존재 자신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다.(참고: 네이버 지식 백과) 


요즘처럼 사회적 격리를 권장하고 있는 분위기에서는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만 있게 되는 상황이 된다. 반강제적 고립 생활을 하다 보니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 사태와 프랑스의 '통행허가증이 있어야만' 밖에 나갈 수 있다는 소식은 점점 두려움의 크기를 더 크게 실체적으로 가깝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최소 11개월은 지속될 거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며 이제 공포감까지 몰려오고 있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두려움에 처해 있어 나가는 것도 조심스럽고 혹여 마스크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갔을 때의 따가운 눈총도 견디기 힘든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사실 실제적인 위험보다는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해 미리 소급해 걱정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은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라르스 스벤젠의 글을 읽게 되었다. 두려움이란 실제적인 위험이 아니란다. 결핍과 억압의 기억이 미래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정서적 심리현상이라고 라르스 스벤젠은 언급했다.  (참고: 이예미, 두려움의 철학, 라르스 스벤젠 저, 성균관대학교                                                                              번역. TESOL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또 소설 모파상의 「두려움에 대하여ㅣ기 드 모파상 지음| TR 클럽 옮김| 위즈덤커넥트 |2018년」에서도 위험과 두려운 상황은 다른 것이라고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토로한다. 주인공 일행은 아프리카로 가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중이다. 저녁 식사 후 이들은 갑판 위에서 군 장교가 겪었던 두려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배가 6시간 동안 거대한 바위 위에 걸린 상태로 장교가 거의 죽을 뻔했던 상황에 대해 말한다. 그때 곁에 있던 키 큰 중년 남자가 위험과 두려운 상황은 다른 것이라며 대화에 끼어든다. 서술자는 이 키가 큰 남자가 이름도 모르는 먼 지역을 아주 많이 여행해 본 것이 확실했고 그의 태도에는 용맹함이 충만했다고 표현한다.  



“사령관님, 아까 두려웠다고 말했죠. 죄송하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군요. 두려움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당신이 겪었던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이라면 눈앞의 위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요. 긴장감에 가득 차서 흥분하고 들뜨겠죠. 하지만 두려움이란 전혀 다른 것이죠.”     


사령관이 웃더니 그의 말에 대답했다. 


“하,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그때 두려웠다고.”
그을린 얼굴의 남자가 의식적으로 우리 쪽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조금 길게 설명하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두려움이란, 가장 용감한 사람도 두려움은 느끼는 법이에요. 끔찍하면서도 잔인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죠. 영혼이 일종의 분해 작용을 일으켜 조각나고, 두뇌와 심장이 일시적 발작을 일으키죠. 두려움의 기억은 고통의 경련을 일으키죠. 하지만 용감한 사람은 불길 안에서도, 당면한 죽음 앞에서도 알려진 위험 앞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요. 두려움은 아주 특별한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튀어나오고모호한 위험 속에서 신비한 영향력을 가지고 움직여요유령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유령을 봤다고 생각하면 극도의 두려움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러자 그을린 키 큰 남자가 사하라 사막에서의 있었던 두려움의 경험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는 황량한 땅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뗀다. 사실 키 큰 남자는 모험을 좋아하는 관계로 사하라를 가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했다. 친구 두세 명과 8명의 안내인, 4마리의 낙타와 기수들을 포함해 사하라 사막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근처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커다란 북 같은 것이 굴러왔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래의 북’이었죠. 멀리서 바닥을 두드리면서 굴러오더니, 이제는 더 크게 땅을 울리다가 다시 약해졌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기괴하게 굴렀어요.”     


안내인들의 겁에 질려, 죽음이 바로 앞에 있다고 소리침과 동시에 키 근 남자의 친구가 일사병으로 죽는다. 안내원의 설명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모래의 북이라 일컫는 맹렬한 북소리는 바람이 마른 이파리와 나무를 때릴 때 모래 알갱이가 튀어 오르고 하늘로 오르면서 메아리치는 현상이라고. 모래 알갱이들은 모래 계곡을 지나면서 소음이 강화되고 확대돼 부풀려질 수 있는 모래의 북은 그 소리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환상이었다고.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이어서 키 큰 남자는 두 번째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 북서부에서 사냥을 하러 숲을 헤매던 중 낡은 집에서 묵었던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낡은 집의 아버지는 사냥꾼으로  2년 전에 밀렵꾼을 죽였는데 그 이후 살인의 기억에 시달리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날도 바깥은 바람 소리로 요란했다. 여기에서도 두려움의 근간은 실체가 없는 '소리'였다. 사냥꾼이었던 그 늙은 남자는 바깥의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는 사냥총을 잡고는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가 왔어요. 그가 왔어요. 소리가 들려요.”    

  

잠자고 있던 개 또한 머리를 들더니 털을 거칠게 세우며 울부짖었고, 납빛으로 변한 사냥꾼은 “개가 그 사람 냄새를 맡는 거야. 냄새를 맡는 거라고. 내가 죽인 그가 저기에 있어.”라며 외친다.      


“약 1시간 동안 개는 움직이지도 않고 짖기만 했어요. 악몽의 고통에 젖은 듯 격렬하게 짖었어요. 두려움, 끔찍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어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은 두려움이었어요.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예요.”     


뭔가가 벽 바깥에서 숲 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문 옆을 지나가면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두려움에 떨던 사냥꾼의 총이 예기치 않게 발사된다.     


“밖으로 나가자 벽의 바닥에, 그러니까 창문 아래에 늙은 개가 죽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개의 머리뼈가 총탄에 산산조각 나 있었어요.”      


검게 그을린 남자는 말한다. 

“그날 밤 내게 닥쳐온 위험은 없었어요. 그동안 지나온 수없이 많은 위험의 순간들을 다시 겪을 생각은 있어요. 하지만 창문 사이로 보이는 수염 난 머리를 향해서 총이 발사되던 순간만은 피하고 싶어요.”   


두 가지 경험 모두 실체 없는 두려움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모래의 북’은 모래 알갱이들이 계곡을 지나며 소리로 확대된 환상에 불과했다. 손잡이를 잡으려던 '소리'는 안으로 들어오려던 개의 발버둥을 자기가 죽인 밀렵꾼의 소리로 착각한 것이었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실체가 없는 것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껴서 굴복한 셈에 지나지 않았다.  


스벤젠은 두려움이란 인간이 두려움에게 어떤 역할을 허용하는가에 좌우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두려움이 요구하는 틀에 순응할 수도 있고,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노력도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대공황으로 혼란이 왔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연설을 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말한다. 삶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실체 없는 두려움은 정말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현실에 대한 공포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희망의 언어로 대체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두려움에 갇혀서 살 것인지 희망으로 살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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