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가 된 오솔길
평소에도 8시간 이상은 인공조명이 있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방학이 되면 12시간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한다. 양계장의 닭처럼 불빛 아래 사육당하는 것 같아 기회만 되면 쏜살같이 밖으로 나간다. 운동도 인공조명이 있는 실내에서는 갑갑증이 나서 못한다. 가급적이면 들로 산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며 걷는다.
이렇게 일상에서 지칠 때마다 자주 찾는 나만의 휴식 공간이 있다. 내게 ‘퀘렌시아’ 같은 곳이다. 소가 투우사와 싸우다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는 ‘안식처’ 같은 나의 ‘퀘렌시아’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일터 뒤에 자그마한 오솔길, 바로 그곳이다.
제법 운치가 있는 나만의 홈그라운드인 이곳은 가쁜 숨을 고르게 하고 꽉 막힌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그런데 나만의 공간이라고 붙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동네 주민들도 아침저녁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솔길 초입에는 나무와 나무들끼리 허공에서 손을 맞잡고 있을 정도로 울창하다. 양옆에는 편백나무들이 나란히 서있다. 바닥에는 야자 매트가 깔려있어 밟을 때마다 푹신푹신하다. 걷는 내내 포근한 느낌이 든다. 야자 매트와 바로 잇닿은 곳에 앉은뱅이 애기똥풀들이 수줍게 노란 얼굴을 내민다. 노랑색 뒤로 중간키의 흰색과 분홍빛의 철쭉꽃이 귀부인의 양산처럼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인생길이 그렇듯 평탄한 길을 지나면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1600보 정도 평지를 걷다 보면 제법 숨이 찰 정도의 경사진 길이 나온다. 누구와 대화라도 하면서 걸을 때는 숨이 가빠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언덕을 올라 끝까지 가면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서 멈춰 하늘을 보면 하늘보다 먼저 건너편 고층 아파트가 눈을 가린다. 그 아파트를 뒤로 한 채 다시 왔던 길로 3000보 정도 걸으면 도로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게 된다.
구름다리 위에서 보면 도로 양쪽으로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다. 구름다리 위의 시선이 아파트의 허리와 딱 맞춰진다. 도로 위의 허방다리 위에 있는 느낌이랄까.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내 모습과 중첩이 되어 묘한 기분이 든다. 다리 아래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좌우 양옆의 길가에는 사람들이 걸어간다. 안개 낀 날 걸을라 치면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다.
구름다리 왼쪽의 오솔길에서 이젠 오른쪽의 오솔길로 넘어선다. 왼쪽과 달리 대나무 숲도 군락을 이루고 있어 담양의 대나무 숲길에 들어선듯하다. 푸르른 대나무가 쭉쭉 뻗어있어 눈도 시원하다. 끝까지 걸으면 한강 고수부지로 나갈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철 울타리로 막아놨다.
구름다리 왼쪽과 오른쪽 길을 걷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12000보 가까이 걷게 된다. 캄캄한 밤에 오솔길을 걸을 때는 아파트 불빛으로 그림자가 생긴다. 비탈길에서 내려오다 보면 내 그림자를 따라 걷게 된다. 걸을 때마다 그림자도 작아졌다 커졌다 하면서 움직인다. 땅의 기운과 공기만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 평온하니 마음이 아주 맑아진다.
가라앉힐 수 없는 갈망이 가슴속 깊이 꽉 차오르는 날이 있다. 그것이 고통스럽게 나를 동요시킬 때면 이곳으로 달려온다. 걷다 보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 공간과 내가 가깝게 연결되어 깊은 호흡을 하게 한다. 내가 기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가슴속 깊이 있는 나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나만의 피난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