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사랑은 끝도 없이 흘러가네

영화 <아키코>에 대한 단상

by 진순희

봉준호 감독이 2019년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들 중 하나라고 뽑은 <아사코>의 일본어 원제는 <잠들어도 깨어있어도>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아사코Ⅰ&Ⅱ>라고 소개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아사코(카와타 에리카)는 오사카 출신으로 우연히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를 사진전에서 만나 운명적인 아니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바쿠’라는 인물이 참 독특하다. 방랑기가 있는 그는 한 번은 크림빵 사러 나갔다가 아카코가 기다린다는 것이 생각나 다음날 돌아온다. 그때 바쿠는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언제든 아사코한테로 돌아온다고. 두 번째는 아예 자발적인 실종이다. 신발 사러 나갔다가 5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바쿠를 잃은 상실감에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던 아사코는 공간을 이동한다. 도쿄로 이사해 찻집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바쿠와 똑같은 얼굴의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조우한다. 료헤이의 적극적인 다가옴에 망설이다 결국 료헤이와 연인으로 발전한다. 료헤이와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바쿠가 나타나 “언제든 돌아온다고 했지.” 라며 아사코에게 손을 내민다. 방금 헤어진 연인처럼 스스럼없이 아사코에게 다가간다. 바쿠를 따라나섰던 아사코는 문득 생각한다. 진정으로 사랑한 상대가 료헤이었다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상처를 준 료헤이에게로 돌아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아사코는 료헤이의 청혼을 받는다



“난 평생 넌 못 믿을 것 같아. 강물이 불었어 더러운 강이군”
이라고 읊조리는 료헤이에게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이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다르게 말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순애보 같은 사랑을 보이는 료헤이에게 아사코는 흔들리는 풀잎처럼 휑하니 떠나간다. 그동안의 아사코는 예고도 없이 떠나버린 바쿠를 못 잊어 슬픔 속에 살아온 사람이다. 힘들었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이제 료헤이에게 곁을 내준다. 인제는 중심을 잡고 사나 보다 싶을 때 언제나저럼 제 마음대로 인 바쿠를 따라가는 사고를 친다. 이쯤 되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운 대형사고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이미 바쿠와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바람처럼 떠난 사람에게 분노나 한 마디 원망도 없이 쪼르르 자석에 끌린 듯 아사코는 바쿠와 동행을 한다. 아사코는 바쿠에게 받았던 상처를 고스란히 료헤이에게 안긴다. 상식을 넘어도 수위가 너무 높다. 아무리 사랑이 재난이라고 하지만 아사코의 이성을 잃은 태도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료헤이와의 함께한 시간이 5년이 넘었는데도 불쑥 나타난 ‘바쿠’에게 혼을 뺏기는 것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바쿠와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료헤이를 사랑한다”며 따라갈 수 없노라고, 돌아가겠노라고 태도 전환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참 황당하게 다가온다.

관객을 뜨악하게 하는 역시 바쿠도 만만치 않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콘인 바쿠 또한 쿨하게 대응을 한다.

아사코를 쓰윽 한번 쳐다보고는 자동차를 가리키며 가져가라고 한다. 빈 말이라도 붙잡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난 평생 넌 못 믿을 것 같아.”라는 료헤이의 말에서 아사코의 앞날도 명랑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둘이 운명처럼 만난 것처럼 처음부터 설정을 하지만 바쿠의 태도나 아사코의 선택을 보면 사랑은 그냥 형체가 없이 흘러 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엔딩이 되면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노랫말에 이들의 사랑을 다 담아내고 있다.


자나 깨나 사랑은 끝도 없이 흘러가네
덧칠할 때마다 선은 두껍고 깊고 강해 지네
하늘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을 모아
이제 겨우 도착했네
한 번 피어난 사랑은 다시는 꺼지는 일 없이
하늘과 바다 사이를 돌고 돌고 도네

-중략


노래 가사의 “사랑은 끝도 없이 흘러가네”의 주체는 ‘아사코’일까 ‘바쿠’일까 ‘료헤이’일까?

흘러가는 물줄기에도 주체는 있다. 그렇듯이 영화 <아사코>에서 사랑의 주체는 ‘아사코’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영화를 전반부 후반부로 나눌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경계가 뚜렷하다. 전반부는 아사코가 바쿠랑 사귀다가 바쿠가 사라지고 료헤이와의 연인관계를 이루는 데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반부는 <아사코>의 영어 제목인 <아사코Ⅰ&Ⅱ>의 아사코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아사코와 바쿠의 관계에서 아사코는 그저 수동적으로 바쿠의 일정에 맞춰있다. 크림빵을 사러 가서 안 들어오는 바쿠를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가 “언제는 아사코 앞에 나타날”거라는 바쿠의 말에 안심하는 순응적인 인물이다. 여기까지 보면 아사코가 참 쉬운 여자이긴 하다.

‘바쿠’의 잔영을 지울 수 없어 료헤이의 은근하지만 끈질긴 구애에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속 깊은 료헤이에게 곁을 내주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


출처: 네이버 영화- 료헤이한테 돌아오지만 배척을 당한다



후반부라고 할 수 있는 아사코가 바쿠를 따라나서는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의 아사코이기에 아사코Ⅱ라 명명할 수 있다. 바쿠를 선택하는 것도 아사코의 의지이고 바쿠와의 사랑을 중단하는 것도 아사코의 결단이다. 료헤이에게 평생 못 믿을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아도 아사코는 료헤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에는 흔들림이 없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버림을 받아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아사코가 떠나고 없는 와중에도 아사코의 고양이 ‘진탄’을 버리지 않는 료헤이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명을 존중해서일까 아니면 아사코가 돌아올 거라는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도였을까?

이것저것 생각할 꺼리가 많은 영화이다.

<아사코>를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해피아워(2015)와 다큐멘터리 노래하는 사람(2013)을 연출했다. 그런데 감독보다 더 사람들에게 회자된 것은 ‘아사코’ 역을 맡은 카와타 에리카와 ‘바쿠’와 ‘료헤이’를 연기한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불륜이었다.

두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이 두 배우도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두 편의 현실 속 드라마를 재현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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