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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y 25. 2020

결국엔, 아들러였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이성 그 허망한 이름     


한때는 나도 불타올라온 적이 있었다. 믿음이. 

자녀도 하나님이 잠깐동안 청지기처럼 내게 맡긴 거라 생각하며 소명의식을 갖고 아이를 키웠다. 그땐 정말 믿음이 좋았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이웃의 집사님들과 걸어서, 차로 압구정동까지 새벽 기도를 갔으니 말이다. 

     

이렇게 부지런을 떨었던 이유는 장 권사님한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더 컸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쏙 드는, 존경심마저 드는 권사님이 계셨다. 60대 중반의 장 권사님을 뵐 때마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늙어가야지 할 정도로 그분은 푸근하고 교양이 있었다. 게다가 물질적으로도 풍족하셔서 형편이 어려운 구역 식구들을 챙기곤 하셨다. 믿음이 좋으면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을 내려 저렇게 잘 사나 보다 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까지 있었다.  

    

그런 장 권사님이 한동안 보이 지를 않았다. 교회에서도 뵐 수가 없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해서 댁을 찾아갔다. 장 권사님이 살던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와서 살고 있었다. 풍문으로는 사업이 쫄딱 망해 이사를 갔다고도 하고 장 권사님이 불치병에 걸려 산속으로 요양하러 갔다고도 했다. 말 그대로 소문만 무성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장 권사님을 만났다. 한 달에 한 번 교회에서 설립한 00 기도원에 갔을 때였다. 그날따라 성도들이 많이 참석해 밥을 타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밥을 받으려 하는 데 머릿수건을 쓴 모양새가 너무도 눈에 익었다. 밥을 받다가 멈춰서 바라봤더니 그때, 밥을 퍼주던 분이 고개를 살짝 들고 바라봤다. 세상에나, 장 권사님이셨다. 깜짝 놀라 두 손을 덥석 잡으니 눈물을 가득 담고 저쪽으로 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뒤에 줄이 이어져 있어 자리로 돌아갔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더니 바로 오셨다.


      

장 권사님 댁 마당엔 꽃도 웃음도 은근하게 피어났다


쓸쓸한 웃음을 띠며, 삶이 한바탕의 꿈이었다며 한숨을 깊이 내뱉으셨다. 황망해서 눈도 못 맞추고 어쩔 줄을 몰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간의 사정을 띄엄띄엄 말씀하셨다. 큰 아들 사업하는 데 집 담보를 해줘서 한 순간에 집이 날아가 버렸다고, 큰 아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연락조차 안 된다며 내레이터가 말하듯 먼 곳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하셨다. 때로는 한숨이 때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유리창 너머로는 장 권사님 부군 되시는 분이 기도원 마당을 쓸고 계셨다.      


저도 미안하겠지. 지 부모 오갈 데 없이 만들어 놔서. 교회 기도원에서 밥이나 해주며 살고 있는 걸 보면 저도 뵐 낯이 없겠지. 너무 미안해서 그런지 소식도 알 수 없고 아들과의 연도 끊어졌어. 

     

장 권사님 큰 아드님은 동네에서 소문난 엄친아였다. 인성도 좋아서 마을에서 키우는 아들처럼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과묵한 데다 공부 못하는 어려운 학생들은 자기 집으로 불러다가 가르쳐 아이들도 자기 친형보다도 더 따르고 좋아했다. 당연히 부모의 신망은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들이 사업 자금이 모자란다고 집을 담보로 융통해 달라고 했을 때 어느 부모인들 안 해줬겠는가. 그렇게 믿을 만한 아들이었으면 나라도 남편 몰래 집을 잡혀서라도 돈을 마련해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 사업이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그동안 책상물림으로 공부만 했던 권사님 큰 아들은 친구 말만 듣고 덜컥 사업을 했다가 자기 자신은 물론 부모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믿었던 큰 아들이 결국 대형 사고를 쳐 모든 가족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장 권사님의 큰 아들 사례를 보면서 계몽주의에 긍정적인 개념이었다가 도구적 이성으로 추락해버린 ‘이성’의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의 이성을 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문명비판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 많고 탈 많은 ‘도구적 이성’을 언급했다. 특히 호르크 하이머는 현대사회를 광기와 야만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봤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에서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고야의 판화를 보여 주며 이성의 깨어 있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인류는 그동안 이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이성이 힘을 발휘하는 계몽의 합리성은 탈마법화, 탈 미신화를 통하여 종교의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했기에 더욱 믿었으리라.      


합리적 지식은 미신에서 탈피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합리적 이성이었다. 미신의 자리에 정밀한 지식이 자리 잡기 위해 합목적적 합리성이 요구됐다. 목적에만 부합되면 판단 능력인 이성을 이용해 일부의 사람들은 ‘생각 없이’ 행동했다. ‘이성의 도구화’라고 계몽의 이성이 오히려 야만의 이성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 까닭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이를 증명했다.  

     

예루살렘의 전범재판에 참석했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고 아무런 생각이나 비판 없이 직무를 따른 그의 ‘생각 없음’이 악마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 시인인 프리모 레비 또한 그에게 ‘생각하지 않은 죄’를 물었다. 아무튼 이성에 대한 신뢰가 나치에 이용되면서 이성은 급 추락했다. 인간을 위한 계몽적 사상인 이성이 인간의 해방이 아닌 오히려 인간의 억압으로 나타났다. 이성이 잘못 발휘되어 야만적 이성을 드러낸 셈이었다. 합리적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장 권사의 큰 아들처럼 우리를 배신하고 오히려 재앙이 되었다.      



출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프란시스코 고야, 1797년 https://blog.naver.com/stday23/220542717781



아들러를 소환하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에선 합목적성 합리성으로 인한 가치 영역이 사라진 것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테면 구별 짓기나  구획화, 젠트리피케이션 호모 사케르 등을 통해 결국 아들러의 공동체 의식을 대안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상대를 타자화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누구인가 저자는 묻고 있다. “타자는 나와 삶의 규칙이 다른 사람”이라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처럼 타자는 나와는 서로 규칙이 다른 사람이다. 규칙이 다르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다. 나와 ‘마주침’을 통해 존재가 증명되는 타자는 나와 다른 존재로 만들면서 자아를 드러낸다.  

    

‘열등한 타자’의 대표 격인 왕따는 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 낸다.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든 단순 쾌락이든 간에 왕따 문제는 한 개인을 황폐화 시킨다는 점에서 악의적이라고 저자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타자화를 하는 것은 사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공간도 계급으로 쪼개지는 ‘공간의 구획화’ 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용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공간의 구획화는 분할과 배제 그리고 통제와 혐오를 원리로 작동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구획화는 사실상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자본의 논리가 자리한다. - 중략 - 공간과 공간을 비교하고 우열에 따라 재편성하는 것, 이런 상스러운 전략이 공간 구획이다. 따라서 공간 구획화는 통치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전략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우월성을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은 싸구려 욕망 때문이다.      

-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 88쪽     


다른 공간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우습게도 내가 거주하는 공간의 우월성으로 인한 것이다. 남보다 월등하다는 인간의 욕망을 자본이 교묘하게 이용한다. 자본은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로 심지어 거주하는 아파트의 평수나 브랜드 명에 따라 구획화한다.        


공간의 고급화를 낳는 젠트리피케이션    

 

예전의 아기자기한 추억이 깃들었던 동네들이 사라지는 일이 흔해졌다. 홍대, 경리단길, 연남동 등의 도시에서 원주민을 내쫓고 자본력을 갖춘 거대 기업들이 차지해 그 동네만이 갖고 있던 특색이 퇴색되어 버렸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처음 사용한 도시 재생과 관련된 용어다. 글래스가 목격한 것은 우리나라에서처럼 핫 플레이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독특한 분위기의 매력적인 카페나 공방이나 갤러리 등이 들어서면서 유동인구가 증가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상권이 활성화되고 그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된다.      


방송인 홍석천의 태국 음식점 마이타이의 폐업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젠트리피케이션은 그  폐해가 심각하다. 14년 동안 이태원에서 태국 음식점을 경영하며 방송에서 많이 알려져 있던 터라 그의 폐업 소식은 많은 이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가 밝힌 여러 요인 중에 ‘폭등하는 임대료’가 제일 컸다.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의 운영자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으로  공간의 계급 이동을 불러온다. 공간의 고급화는 경제적 여유를 지닌 계급이 그 반대의 계급을 대체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이후의 생기는 것은 자본으로 재편성된 개성이 없는 고만고만한 비슷한 도시로 전락해버린다. 예뻐서, 신기해서 가봤던 골목이나 거리는 없어지고 프랜차이즈 점포로 도배하다 시피한 그저 그런 유사 도시로 변형된다. 저자는 젠트리 피케이션의 문제점으로 사람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포함된 채 배제시키는 ‘호모 –사케르’     


현대인을 ‘호모 사케르’라고 명명한 사람은 조르조 아감벤이었다. 고대 로마의 죄인을 가리켰던 호모 사케르는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형벌은 받은 죄인”을 일컫는다. 현대는  신체에 고통을 주는 형벌이 사라진 반면에 사회로부터 격리 시키는 것으로 그 죗값을 치르게 한다.    

  

 호모 사케르를 조르조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표현했다. 그 이유는 사회적 정치적 생명 없이 생명학적 생명만 있는 ‘조에 zoe’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 bios’가 아니라, 살아있지만 사회적 인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일터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해 높은 건물의 옥상이나 번화가 광고탑에 올라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는 호모 사케르들. 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된 채 타자화된 호모 사케르, 그들의 절규를 언제까지 하나의 풍경으로만 건너다볼 것이냐고 저자는 말한다. 타인의 아픔에 침묵하지 말라고.    


  

출처: 연합뉴스- 삼성 해고자, 강남역 철탑 시위 중 정년 맞아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먼 타인이다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참 감동스러운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에 느닷없이 만난 아들러가 그랬다. 책에는 타자화로 구별 짓기를 하고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공간을 구획화하고,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계급의 이동이 양산됨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공동체 지수가 0인 나라에서 공동체 감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아들러가 얘기하는 “공동체 감각이란 상호 의존적 감각으로, 연대감과 유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는 물론 타인에 대한 신뢰가 공동체 감각의 핵심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아픔에 더 이상 눈감아서는 안 된다.     

 


늘 자신뿐 아니라 타자도 생각할 수 있는 것, 타자는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공헌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자신과 타자는 상호의존적이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희생적인 방식이 아닌 형태로 타자에게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들러는 이런 생각을 ‘공동체 감각’이라 불렀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173쪽     


나만의 특권은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논리에 더 이상 포섭되지 않아야 한다. 배려 나눔 협력, 타인 존중의 공동체 감각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문학 공부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내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다”라는 프랑스 빈민의 대부 피에르 신부의 말이 값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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