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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un 06. 2020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질 때

우리는 방관자이다

『싸우는 소년』과 싸우다


아침부터 『싸우는 소년』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학교를 격주로 가다 보니 수행평가를 준비하는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학교가 다르고 반이 같지 않다보니 아이들마다 제각각이다. 책 스무 권 중에서 선택한 책들이 아이들마다 다 달라서 읽어낼 책이 꽤 된다. 내일까지 수행평가를 대비한 발문을 만들고 인터뷰 형식의 글도 써놔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그것을 가이드 삼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조금씩 변형해서 써낼 수가 있다. 요 며칠 각각의 책 한 권씩 읽고 독서 문제를 내려다 과부하가 걸렸다.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스타벅스에서 휘핑크림이 잔뜩 들어간 모카커피를 주문했다. 지금 나도 『싸우는 소년』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살아내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다.


영화 <부당 거래>에서 극 중 검사로 나오는 배우 류승범은 말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마찬가지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질 때, 사람은 그렇게 병신 같아진다”며 『싸우는 소년』에서 오문세 작가는 일갈한다. 폭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인물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임은 물론이다.

『싸우는 소년』은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인 <그치지 않는 비>의 작가 오문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청소년 문학이지만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알코올 중독과 같은 제법 묵직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읽고 나서도 쉽게 책을 놓지 못했다.

태권도 선수인 안승범 패거리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린 서찬희. 주인 잃은 서찬희의 책상에는 항상 하얀 꽃이 놓여 있다. 왜 아무도 그 사고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서찬희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방관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소설 속 ‘나’는 트럭에 몸을 던지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한다. ‘나’처럼 게임을 좋아하고 영화를 보는 게 취미였던 내 짝 서찬희. ‘나’는 예전처럼 찬희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한탄한다.


찬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우발적인 행동을 해  온몸이 망가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를 당한 아마추어 복싱 선수 오산이를 만난다.

“그냥 때려주고 싶은 애”가 있어서 복싱을 시작했다는 산이 누나를 통해 ‘나’ 역시 안승범과 싸우기 위해 복싱 도장을 찾는다.


주찬영 관장이 준 글러브 안에 ‘I’라고 새겨진 글자를 궁금해 하던 차에 '나'는 산이 누나와 함께 ‘I’의 주인공인 주 관장의 동생 주아이를 만나게 된다. 산이를 도우려다 오히려 주아이는 학교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의식불명으로 3년째 호흡기를 달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폭력은 축축하게 일상에 스며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반장인 양아영의 노트를 건네받는다. 물론 이 노트 덕분에 유급하지 않고 복학할 수 있었다. 폭력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선 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양아영 역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반 친구들은 양아영과 관련해 나쁜 소문을 끊임없이 생산해냈다. 양아영은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정리해보려 담임선생님께도 말해보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양아영을 왕따 시키는 반 여학생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을 해 양아영을 더욱 힘들게 했다. 양아영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공부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교실에서는 안승범 패거리가 찬희를 괴롭히는 것처럼 표면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양아영을 교묘하게 왕따시키는 것처럼 은근한 방식의 따돌림도 자행되고 있었다. 언어폭력으로 또는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양아영을 투명인간 취급했던 것처럼 폭력은 축축하게 일상에 젖어있었다.   


죽어가던 서찬희의 유서를 교복 안주머니에 간직한 ‘나’는 안승범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서찬희가 자살을 선택할 때까지 안승범 패거리를 방관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나’, 강준혁은 회한의 나날을 보냈다.


『싸우는 소년』에서의 ‘나’의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며 제노비스 사건과 겹쳐졌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세 번째 실험인 <달리와 라타네의 사회적 신호와 방관자 효과>에는 그 유명한 제노비스 사건이 나온다.



1964년 3월 13일, 13일의 금요일이었다. 그날 새벽 3시 15분 뉴욕 주 퀸스 지역의 캐서린 제노비스가 귀가하던 중이었다. 펑크스타일의 검은 머리에 가냘프고 날씬한 스물여덟의 제노비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왔을 때 뒤따라온 덩치 큰 윈스턴 모즐리의 칼에 부상을 당한. 젊은 여성의 비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어머, 세상에. 이 남자가 칼로 날 찔렀어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38명의 목격자가 시선을 고정했다. 비명을 듣고 동네 사람들의 집에 불이 켜졌다. 불빛에 범인이 놀라 달아났지만 6분 뒤 아파트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자 윈스턴 모즐리는 두 번째로 여자를 찔렀다. 누군가는 내려오는 대신 “여자를 내버려 두시오.”라고 소리만 쳤다. 그는 사라졌다가 6분 뒤 다시 여자를 찔렀다.


“불빛은 켜졌지만 왠지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올 것 같지는 않았어요.”

아파트의 불빛이 꺼진 것을 확인한 범인은 여자 쪽으로 다시 와 반복해서 찔렀다. 젊은 제노비스가 30분 동안 강간과 살해를 당하는 동안 목격자 38명 어느 누구도 도와주거나 신고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그러지 않았다.사건이 끝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녀의 목숨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


제노비스 사건과 침묵한 38명의 증인들


<뉴욕 타임스> 지에서 38명이나 되는 방관자들의 기이한 행동을 시리즈로 보도하자 미국 사회가 때아닌 도덕성 문제로 들썩거렸다. “관련된 증인 명단을 입수하여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뉴욕 타임스> 지의 의무”라고 한 독자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대가로 대중의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고.” 울분을 토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 “<뉴욕 타임스> 지 1면에 그 이름과 주소가 전원 공개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도 있었다.


상황의 힘을 믿은 사회 심리학자인 뉴욕 대학의 존 달리와 컬럼비아 대학의 빕 라타네는 제노비스가 희생된 사건을 실험을 통해 규명했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개인별 느끼는 책임감은 적어진다는 ‘책임감 분산 diffusion of responsibility’ 현상을 정립했다. 구경꾼들의 존재로 책임감이 공평하게 나눠지기 때문에 방관자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경꾼 효과,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 하는 이것은 구경꾼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주저하는 것을 지칭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5p1KiR-xJJw 


 찬희네 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안승범의 패거리에 희생당한 찬이는 죽어가면서도 “정말, 미안해. 부탁해. 너밖에 없어.”라고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를 한다.


안승범 패거리가 두려워서, 내가 아닌 것에 안도감을 느키며 '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아니 대항할 생각조차도 못 먹는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들어와서야 싸워볼 염두를 낸다.

  

산이 누나도 ‘I’도, 양아영도 ‘나’의 부모님도 매 순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병원에서,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며 알게 된다.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싸우는 것을 멈출 수 없음을 인식한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이겨내고 옳은 것과 정당한 것을 위해 안승범에게 운동이 아니라 ‘싸움’으로서의 결전을 벌인다. 구경만 해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강한 ‘잽’을 날리는 것보다 살아가는 데 있어 옳은 행동을 위해 ’‘잽’을 날리는 용기를 낸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동안 도망쳐왔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는 승리한다. 애써 외면해왔던 교운 앞에서  피켓들고 시위하는 찬희 아버님도 만날 결심을 한다.


자기 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것


“오산이는 이제 링에 어울리는 선수가 됐다. 나는 오산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자리를 자기가 만드는 거라고. ”


주차영 관장은 산이가 복싱을 시작할 때는 미미했지만 지금은 선수로서의 기량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며 링에 어울리는 선수라고, 자기가 있을 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거라고 ‘나’에게 말한다.


“왜 싸우려는 거야? 아무 이득이 없잖아.”라고 묻는 양아영에게 곧바로 반박은 못하지만 ‘나’에게는 서찬희와의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고 속으로 되네인다.


안승범에게 주먹을 날린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뭐든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부당하게 닥쳐오는 고통을 외면하고 잠자코 수그러들기만 기다리면 그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올 뿐이다. 저절로 나아지는 상황 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 새끼가 맞을 짓을 한 거야. 아무도 안 때리니까 나라도 때려야지.”

- 『싸우는 소년』, 221~222쪽


옳지 못한 일에 방관하기도 쉽지만 자신도 모르게 내 안의 ‘나’에 방관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건 사실 잠깐 동안의 위안일 뿐이다.

녹슨 일상과 싸우고 옳지 못한 행동에 맞서고 자신의 나태함을 이겨내려 할 때 자기 자리는 만들어진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싸워 나가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강력한 이 한마디,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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