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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un 21. 2020

세상에 체했을 때, 징게미 젓과 토하젓으로

우리家한식-2020 한식문화 공모전

“홍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징거미민물새우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 곬족>    

 

시인 백석은 <여우난 곬족>이란 시에서 명절날 아침의 활기찬 풍경을 아주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에서도 음식을 통해 어린 시절의 그리움과 추억을 되살려냈다. 

  

그의 시  <여우난 곬족>의 “명절날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으로 시작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명절을 맞아 시댁으로 열 시간 가까이 꾸역꾸역 시동생 가족과 두 집이 차 한 대에 어른 넷에 아이 넷을 낑겨서 도착할 때쯤이면 어머님은 마을 어귀까지 나오셔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계셨다. 한참을 서 계시던 시어머님은 손자들이 내리면 내 강아지 하면서 앉은 키로 얼른 품 안에 아이들을 안았다.     


당신의 아들들이 마당에 들어서면 어머님은 재빠르게 부엌으로 들어가셔서 가마솥에 갓 지어낸 밥에 징게미 젓과 토하젓을 내왔다. 시댁에서는 징거미를 징게미라고 불렀다. 서울 생활에 체하고 사람에게 속이 얹힌 시동생과 남편은 스윽스윽 비벼서 무덤처럼 봉긋이 솟은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아들들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다 그제서야 며느리들이 눈에 들어왔는지 너희들도 부지런히 먹으라고 겸연쩍게 말씀을 하시곤 했다.    

  

결혼하기 전에 남편은 명동 스튜디오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다. 월급도 따박따박 잘 나오고 봉급도 제법 많이 받고 있었다. 결혼 날짜를 잡으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에 부담이 생겼나 보다. 잘 다니던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독립을 한다고 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성실하고 기술이 좋은 사람이니 잘 해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남의 밑에 있을 때랑 자기가 주인이 되어 꾸려나갈 때랑은 천지차이였다. 일을 열심히 하고 신망도 있어서 일감은 끊이질 않았다. 기업의 제품을 촬영하고 카탈로그도 제작해서 납품을 했다. 많은 일을 발 빠르게 하기는 했지만 손에 쥐는 게 없었다. 우리 집 남자한테 가장 어려운 것은 수금이었다. 남편에게 일하고 나서 돈 받아오는 일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푸는 것보다도 난이도가 높은 문제였다. 그놈의 수금을 못 해와 신혼을 우울하게 보내야만 했다.   

      

즐거워야 할 신혼이 궁핍하다 보니 남편은 툭하면 체하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도 늦은 시간이 되면 냉장고 문을 열고 징게미 젓과 토하젓을 번갈아 가며 뜨끈한 밥에 비벼먹고는 아침이면 거뜬해서 나갔다.   

   

생각만큼 풀리지 않는 시간이 마냥 길어졌다. 탄탄한 월급쟁이로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남편은 되도 않는 사업이랍시고 벌렸다가 애를 먹고 있었다. 세상이 어디 실력으로만 살아지던가. 영업력 못지않게 수금하는 재능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면에서는 젬병이었다.     


남편의 말수가 적어지고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날이면 고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땐 아이들도 어리고 학교 갈 때가 아니어서 한 번 가면 대엿새는 족히 묵고 왔다.


어머님도 아들이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징게미 젓과 토하젓을 내놓으셨다. 징게미 새우에 무를 썰어 넣은 무이징게국을 내오면 토하젓에 한가득 밥을 비벼 먹으며 무이징게미국을 한 대접씩 비웠다. 시댁은 마을 끝자락 산 등성이 가까이에 있었는데, 툇마루에서 산을 바라보면 마치 그 산이 우리를 품어주는 것 같았다. 시린 위장을 채우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산에서 남편은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출처: MBN 천기누설 - http://www.mbn.co.kr/totalCastView/49046/134  


여름 여행의 고정된 코스는 시댁이었다. 휴가랄 것도 없이 도시에 사람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우리도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여름휴가를 갔다.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토하젓으로 징게미 젓으로 위를 채우곤 강으로 나갔다. 쟁여두고 먹을 징게미 새우와 토하를 잡으로 망이 가는 대바구니를 들고 아이들은 뜰채를 갖고 따라나섰다.     

징게미 새우는 개울의 돌 밑이나 바위틈에 수초가 우거진 곳에 있었다. 징게미 새우의 몸은 딱딱한 딱지로 덮여 있는 데다 집게가 길고 아주 단단했다. 징게미 새우가 잡히면 큰소리로 징게미닷! 소스라치며 아이들은 꽁무니를 빼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면서도 재미있어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징게미 잡기에 열중했다.       


민물 새우인 토하는 망 같은 것을 확 던져서 끌어올렸다. 요즘은 토하를 보기 힘든데 지금 같지 않게 그때는 징게미 새우나 토하가 잘 잡혔다. 예닐곱 명이 달려들어 새우를 잡아서 그런지 그런대로 많이 잡아왔다.   

   

의기양양하게 전리품을 들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머니께서는 징게미는 징개미 대로 토하는 토하 대로 나눴다. 

아들 손자 먹일 거라고 새우에 묻어 있는 잡풀이 행여라도 들어갈세라 아주 정갈하게 헹궜다. 그렇게 말끔해진 징게미와 새우를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한 달 이상 밀봉해 뒀다. 아들들이 고향에 내려간다는 연락만 하면 절여둔 징게미와 토하를 꺼내 돌확에 갈았다. 믹서기가 있었는데도 아들 손자 맛나게 먹게 해야 한다고 굳이 돌확을 고집하셨다. 


평소에는 마당 한 귀퉁이에 얌전히 있던 돌확이 바빠지는 때가 바로 아들들이 고향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돌확에 간 새우와  찹쌀밥을 눈대중으로 3:1 정도로 버무리고 고춧가루, 마늘, 다진 파와 깨소금 참기름 등으로 양념하여 4~5일 동안 삭혔다. 양념을 미리 해 두면 삭는다고 아들들이 도착하기 5일 전에 만들어놓으셨다.      



징게미 젓과 토하젓을 먹을 때는 <여우난 곬족>의 풍경처럼 들뜨고 부산스러웠다. 아이들은 좁은 집에 있다가 마당이 넓은 집에 가니 마음껏 뛰어놀았다. 남편과 시동생은 고향의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다. 저녁이면 우르르 몰려 들어와 떠들며 명절 분위기를 냈다.      


아들 여섯에 딸 둘의 가족들이 명절날 모이면 왁자지껄 소란한 가운데서도 토하젓이나 징게미 젓에 비벼 먹을 때는 숨죽여가며 단숨에 들 먹어치웠다. “무이징게국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아이들은 밤이 늦도록 놀고 늦잠을 잤다”는 것처럼 시골 고향집에서는 우리 아이들도 마음껏 늘어졌다. 징게미 젓과 토하젓을 떠올리기만 해도 들뜬 명절날 분위기가 생각난다.


서울로 돌아갈 때쯤이면 참기름에 산나물 말린 것에 이것저것 싸주신다. 특히 빈 맥심 커피병에 집집이 토하젓과 징게미 젓을 담으시며


“토하젓 한 숟가락만 먹으면 체한 데는 따로 약이 필요없으야.~”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출처: mbn 천기누설-http://www.mbn.co.kr/totalCastView/49046/134



신혼에 남편이 자주 체했다면 지금은 내가 자주자주 체한다.

몰라주는 세상에 야속해하고 턱없이 높은 문턱으로 소리가 없는 메아리에 마음 시리다. 이럴 때 징게미 젓에 토하젓에 밥 한 그릇 비벼먹고 나면 세상 별거 아니라는 때아닌 고요가 밀려온다. 


징게미 젓과 토하젓과 무이징게국으로 고향에서의 시어머니와 함께 한 따뜻했던 기억만으로도 온몸이 흐물흐물해진다.  우리 식탁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어 나를 살아가게 하고 견뎌내게 한다.   

나도 이제 징게미 젓과 토하젓이 필요한 나이가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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