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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un 28. 2020

그날이 그날인 "당신의 일"이  누군가의 꿈이었다면

“나도 글 쓰며 살고 싶었거든.”

한 소설가의 글을, 책을 읽었다.

한 문장이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몇 년 전에 만났던 H가 생각났다.

     




소설가 친구에 대한 터무니없는 존경과 대접이 낯설고 부담스러워 저는 식사 내내 허튼 웃음과 너스레로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요지부동, 말을 고르는 데 신중했고 몸가짐마저 삼가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런 난센스, 이런 해프닝이라니. 복잡 미묘한 심중을 감추느라 저는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엔 웃음마저 참아야 했습니다.     


좋은 소설 많이 써라. 헤어지면서 친구가 저한테 해준 말이었습니다. 원주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엉뚱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저도 모르게 혼자 실실 웃었지요. 그러다 양평에 다다라서야 저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소설과 소설 쓰는 일에 대해, 그 친구만큼 경건했는가. 엄살과 교만과 비겁함으로 중년의 계절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건 아닌가.     


나도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 양수리의 청명한 가을 물빛 위로 친구의 마지막 말이 파문을 지으며 흩어졌습니다. 다시 원주로 돌아가 친구를 힘차게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 구효서, 『인생은 깊어간다』, 의 「한정식」 중에서, 164~165쪽,    



 


소설가 구효서의 산문집 『인생은 깊어간다』을 읽다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나도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 이 문장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오래 전 나를 만난 H도 그랬다. 이렇게 길게 머무는 것은 한국 떠난 지 30년 만에 처음이라며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얼굴을 보게 됐다. 지하철로 마중을 나가 나의 일터로 같이 왔다. 학원 문 앞에 서는 순간 H가 발을 멈췄다. 문을 열고 있는데 H는 벽에 붙은 아크릴 간판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천천히 고요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다듬는 모양새가 너무나 경건했다. 뭉클하다 못해 묘했다.     


니 이름을 걸고 하는 국어학원이란 말이지. 너의 이름을. 그것도 한국말로 말이지.   

   

H의 가느다랗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다가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한국에서 한국말로 하지 영어로 하리. 참 이상한 생각도 한다 싶었다. 내가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수업 듣는 아이들도 한국인인데 한국말로 하지 그럼 영어로 말을 하리. 게다가 영어라곤 I love you 밖에 모르는데....

속으로만 삼키고 얼른 너스레를 떨며 눙을 쳤다.     


아유, 왜 이러셔욧, 사람 무안하게스리.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자, 자, 얼른 들어가자구.     


그렇게 등을 떠미는 데도 H는 한참을 서서 꾹꾹 도장을 찍듯이 내 이름이 붙은 아크릴 판을 쳐다보며  만지고 있었다.     

H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 짧게 하다 미군이랑 결혼해 한국을 떠났다고 했다. H의 남편은 한국인이지만 이민 간 부모를 따라 그곳에서 성장해 군인이 됐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말로 말하고, 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국에 있는 사람은 모를 거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H는 미국에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일을 했는데, 미국인들이 책을 신청하고 반납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것도 있었고, 제대로 알아듣고 말을 해도 못 알아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해 와서 늘 긴장하며 살았다고 했다.     


고국 나들이 한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인근의 괜찮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정식 집이었는데 앉으면 다리를 내릴 수 있는 좌식 방이었다. 종업원이 옆에 붙어 구워줘 가며 서빙을 했다. H는 그 광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엄청 신기해 하다못해 놀라워했다. 내가 떠날 때보다 한국이 너무너무 발전했다며 말을 하는 H의 얼굴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구효서 작가의 친구처럼 H의 반응도 딱 이랬다. H는 말을 하는 데도 조심스러워했고 몸가짐 또한 조용했다. 나 역시도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딱히 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아무튼 30년 만에 만난 친구가 낯설기는 했다. 서먹서먹한 사람 만나듯이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어수선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여고 시절 얘기를 늘어놨다. 사실 고2부터 문과 이과로 나눠져 함께 한 기억이라곤 고1 때 짧게 한 추억이 전부였다. 쓸데없이 사설이 길어지고 있었다.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H는 음식이 맛있다며 연방 감탄을 하며 먹었다. 미국에도 이 정도의 음식은 흔할 텐데 아마도 한국에서 먹는 음식이어서 남달랐던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성공했냐고 하기에 성공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그렇게 말 해도 H의 얼굴에는 부러움 반 허망함 반이 서려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졸업하고도 이틀에 한 권은 책을 읽고 독서카드를 만들어 우리한테 보여주던 그녀였다. H는 책 읽기도 좋아했지만 글쓰기에도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H의 직장을 찾아갔던 날이 생생하다.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던 H의 말과는 달리 외국에서 텔렉스가 와서 어쩔 수 없이 H의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상황이 됐다. 기다리는 동안 자기가 쓴 글을 읽고 있으라고 준 노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 형식의 에세이가 노트마다 가득 차 있었다.     


“이걸 다 읽고 쓴 거야”  했더니

“으응~ 퇴근이 늦어지고 할 때마다 읽고 쓰고 했어.”라고 말했다.    

  


나도 한국에 있었으면 책 읽기 선생님이 됐을 텐데, 글쓰기 선생님이 됐을 텐데 하면서 나의 직업을 부러워했다. 원 없이 모국어로 말할 수 있고, 자기 나라의 말로 글을 쓸 수 있고 하는 내가 복 받았다고도 했다. 편안하니 보기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며 참 잘 살아왔네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자기는 운 좋게 한국 남자 만나 결혼해서 살지만 미군을 따라온 한국 여자들은 베란다에서 쭈그려 앉아 된장찌개 끓여먹고는 얼른 환기를 시킨단다. H는 내 나라의 음식을 마음 편히 먹고 내 고향의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은 거라고 했다.    

 

H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모국어로 말하고 쓰는 행위가 큰 혜택이고 복 받은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안 해봤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다른 사람의 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게 주어진 길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또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해 온 일이었다.

그런데 H는 나의 일이 자신이 해보고 싶은, 바라마지 않던 일이라고 했다. H를 보내고 나는 정말 내가 하는 이 ‘업業’과 ‘글 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는가. H처럼 경건한 태도로 맞이했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H는 학원 문에 붙은 아크릴 간판을 다시 한번 양 손으로 감싸 안 듯 살포시 얹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글 많이 써. 책 읽기랑 글쓰기도 잘 가르치시고.”      

“나도 글 쓰며 살고 싶었거든.”    

 

헤어지면서 남기고 간 H의 말이 늦가을 밤하늘 사이로 퍼져나가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나도 글 쓰며 살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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