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링 굿』에 대한 다섯 번째 단상
1961년 7월 한 여름 아이다호 주 케첨의 자택에서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권총 자살이 있었다. 백발에 멋진 턱수염을 기른 영화배우 같은 헤밍웨이가 스스로 생명의 끊을 놓아버린 것이다. 헤밍웨이는 알려진 대로 혈색소증을 앓고 있어 그의 몸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명망 있는 소설가로 알려진 지 오래되어 언뜻 보기에 아무런 고민이 없어 보였지만 케첨에 정착한 이후로 그를 붙잡고 있던 과대망상증과 우울증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청년기의 헤밍웨이는 아버지와 같은 의사의 길도, 대학 진학도 모두 거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숙부가 있는 캔사스 시티로 옮겨가서 <캔사스 스타> 지紙의 기자가 된다. 현장 기자로서의 문장을 익힌 그는 “짧은 문장, 간명하고 힘차고 부정문이나 흔해빠진 형용사구를 피하는” 문장을 썼다. 후일 헤밍웨이 문체라고 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이때 다듬어졌다.
헤밍웨이 가문을 타고 내려온 것은 우울증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우울증으로 권총 자살을 하고 두 번째 부인인 폴린 피에프 사이에서 난 그레고리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레고리는 훗날 성전환 수술까지 하고 마이애매의 키 비스키 노상에서 나체로 하이힐과 옷을 든 채 도로 중앙분리대에 앉아 있다가 외설 혐의로 체포된다. 63세 성전환 수술을 했던 그는 글로리아 헤밍웨이라 밝히고 구치소에 수감된 지 며칠 만에, 공판받기 전 6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헤밍웨이 가문의 불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누이와 형제도 자살을 했으며 영화배우이면서 모델인 헤밍웨이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도 할아버지 기일에 자살을 함으로써 헤밍웨이 가계의 우울증을 피해 가지 못했다.
생전의 헤밍웨이는 자신이 조울증 환자임을 알고 있었고, 정신과 의사를 미워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헤밍웨이는 타고난 광기와 예지력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에 비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을 극복하지 못한 그레고리는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해야만 했다. 한때 촉망받던 의사로서 마이애매 의학부를 나와 의사로 개업했으나 우울증에 벗어나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다가 그만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약 중독이 원인이 되어 의사 면허가 취소되었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의 저자 모리시타 겐지는 헤밍웨이가 아들 그레고리에 게 행한 태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탁월한 예지력을 지녔던 헤밍웨이는 아마도 아들의 불행한 미래를 얼마간 예상한 것 같다. 그런 그가 그레고리의 상처를 소설로 예견하기 전에 따뜻한 부성으로 아이를 안아주었으면 어땠을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레고리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안타까움이 너무도 크고 무겁기 때문이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82쪽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에둘러서 헤밍웨이까지 끌어왔다.
“우울증은 흑사병처럼 지위가 높든 낮든, 고급 주택가든 빈민가든, 누구에게나 찾아간다. 분명한 것은, 행복과 성공은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라고 『필링 굿』에서 천명한다.
우울증을 인지 치료로 얼마든지 자가 치료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필링 굿』에서는 ‘위대한 업적이 없어도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왜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완벽주의가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기에 “감히 평범해져라!”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데이비드 번스가 개발한 완벽주의를 극복할 열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11번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실에 맞게 바꿔보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완벽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14번의 ‘수준을 낮추어라’도 공감이 많이 된 부분이다. 저자 데이비드 번즈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데이비드 번즈는 첫 논문을 집필하는 데 2년에 걸쳐서 심혈을 기울인 결과 만족할 만한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자신과 지적 수준이 비슷한 동료들은 똑같은 기간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98점짜리 논문 하나를 내는 게 나을까, 아니면 80점짜리 논문 10편을 발표하는 게 나을까’
98점짜리 논문 한 편 달랑 있는 것보다 800점짜리 논문은 분명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것임이 분명할 거라는 판단 아래 기준을 약간 낮추기로 결정한다. 생산성은 높아졌고 만족감 또한 커졌다고 토로한다.
그동안 여러 매체들이 헤밍웨이의 죽음 문제로 설왕설래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이나 발생한 비행기 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해 건강 문제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부부간의 불화와 특히 좋은 작품을 더 이상 못 쓸 것이란 중압감 등이 원인은 아닌가? 등 여러 소문들이 무성했다. 물론 친분을 쌓았던 AE 호치너는 헤밍웨이 서거 50주년을 맞아 "헤밍웨이가 (FBI의) 감시를 감지했고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고 자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밝힌 바 있다.
헤밍웨이의 자살에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에덴 정원』 집필에 48장이나 되는 방대한 양을 썼음에도 완성까지는 먼 상태였을 때 느꼈을 자괴감이 우울증을 더 심화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헤밍웨이처럼 성취지향적인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치와 자신의 성과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다. 집필이 지지부진하고 성과가 나지 않을 때 자신은 쓸모가 없고 죽어 마땅하다고 단정하지 않았을까. 『필링 굿』에 소개된 홀리처럼 자신에게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고 부정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정신적 여과에 빠졌음이 분명하리라.
말년의 헤밍웨이는 신경쇠약에서 피해망상으로까지 진행되어 결국 강제 입원을 당해야 했다. 여러 차례 전기충격요법을 받았고 실어증과 기억력 감퇴와 같은 부작용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프라이터 앞을 떠나지 않고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그가 지리멸렬한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직시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으리라.
헤밍웨이는 두 번째로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뒤인 1961년 7월 새벽에 생을 마감한다. 닷새나 걸려 도착한 케첨의 별장에서. 아내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와 총구를 입에 물고 발사를 했다. 그의 나이 한창때인 61세였다.
자가 치료가 가능한 인지 치료는 1960년부터 나타나 1980년부터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인지치료가 한 20년만 일찍 꽃 피웠으면 헤밍웨이 같은 거장을 허망하게 잃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많은 아쉬움이 밀려온다.
같은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처칠은 자신의 감정을 글로써 풀어내고 그림으로써 표출해 냈다.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90세까지 장수한 처칠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