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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ul 18. 2020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시선으로부터,』에 대한 소고

『시선으로부터,』의 제목을 읽는 순간 아주 오래전에 봤던 인권 영화 <여섯 개의 시선>이 생각났다. 여섯 명의 감독들의 여섯 개의 ‘시선’을 담은 영화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그녀의 무게’에는 실업계 여고생들이 취업하기 위해 성형과 다이어트를 학교로부터 강요를 받는다. 뚱뚱한 여학생은 채용 심사관들한테 무시당하고, 역으로 채용 심사관들은 자신들의 외모로 룸살롱에서 조롱을 받는다.

    

출처: 네이버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그녀의 무게' 스틸컷


 ‘시선’視線은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주의나 관심을 비유한다. 『시선으로부터,』는 <여섯 개의 시선>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제목부터 중의적이다. ‘시선’은 심시선 여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시선으로부터,』는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정세랑 작가의 ‘주간 문학동네’에 3개월간 연재됐던 소설로 연재 당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T시(대구 보도 연맹 사건이라 추정되는)에서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심시선은 사진결혼으로 하와이행을 택한다. 하와이에서 만난 ‘마티아스 마우어’를 따라 독일로 향한다. 마티아스는 시선을 지구 곳곳에서 수집하여 뒤셀도르프로 데려왔던 여자들의 하나도 만들어 버린다. 심시선은 그의 그림 모델이나 파티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여자로 근근이 지낸다. ‘수집품’에 불과했던 심시선이 독일과 말레이 혼혈인 화가 요제프 리와 어울리며 마티아스의 그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개인전을 여는 등 요제프 리의 도움을 얻어 독립을 하자 마티아스는 내가 사랑한 여자는 시선이었고 “사랑했기에 나의 배신의 견딜 수가 없었다고 썼고 그럼에도 그림과 집과 모든 재산을” 시선 앞으로 남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층에서 거리를 향해 투신자살을 한다. 요제프 리가 마티아스의 애인인 심시선을 훔쳐갔다고 여론몰이를 해서 시선에 대한 온 유럽의 증오심을 부추겼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질투심과 배신감을,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덧칠해 결국 시선을 ‘재능 있는 화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시아의 마녀’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가장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를 몸으로써 증명한다.      


부당한 도시에서 오로지 서로만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었기에, 사람을 꺾는 모멸감 속에서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독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 『시선으로부터,』, 122쪽     


동지애적인 사랑으로 만난 요제프 리와 심시선이었지만 더 이상 해외에 머물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민애방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민애방의 전시회 팸플릿에 평론을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는’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시선으로부터,』의 제목이 품고 있는 함의도 크지만 제목 뒤에 붙은 쉼표도 눈길을 끈다. ‘시선으로부터의 ’~부터는 ‘누구로부터의 from’인지, 또 from이면 반드시 ‘~에게’인 to가 있을 텐데 그 to는 누구일까 생각을 하며 읽게 한다. 강조를 하기 위한 것인지 여운의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인지 책은 다층적으로 생각을 하게 한다. 구성 방식 또한 특이하다. 모두 31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앞머리에 시선의 과거 에세이나 녹취록 또 신선과 관련이 있던 화가의 회고록 등이 나오고 뒤이어 본문에는 시선의 자식들과 손자들의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물론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독특한 것은 사실 심시선 그녀의 삶 그 자체이다.

     

책의 첫 장을 열면 심시선의 가계도가 나온다. 심시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첫 번째 결혼한 요제프 리와 두 번째 결혼한 홍낙현이 축을 이룬다. 자녀들도 이명혜, 심명은(요제프 리가 아버지이나 나중에 엄마의 성으로 바꿨다). 이명준, 홍경아(홍낙현의 딸) 등 여러 성씨의 자녀들이 있다.    


  


심시선 여사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거부하고 장녀 명혜는 10년 전 작고한 심시선 여사의 단 한 번뿐인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기 위한 미션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시선으로부터,』, 83쪽


두 남편 사이에서 얻은 네 자식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식들이 한 번뿐인 제사를 위해 하와이를 찾는다.      


누군가를 기린다는 것은 축제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에 방점을 찍듯이 이들이 올린 제사상의 제물이 아주 특별하다. 

큰 딸 명혜는 라춤을,

명혜의 장녀 화수는 가게 사장님을 모셔와 이동식 조리대에서 즉석으로 구운 팬케이크를,

크리처 아티스트인 명혜의 차녀 지수는 무지개 사진을,

명혜의 남편이며 시선의 큰 사위 태호는 하와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뜨끈뜨끈한 말라사다 도넛을(솜사탕과 도넛을 합친 듯한),

고고미술학자인 시선의 차녀 명은은 하와이 화산 지대에서 지질학자에게 레후아 꽃과 등산화 밑창에 끼여 있던 화산석 자갈들을,

시선의 아들인 명준은 호놀룰루 미술관의 재생 플라스틱 블록 탑을,

명준의 부인인 난정은 레이 목걸이와 하와이 배경 소설 한 권을,

명준과 난정의 딸인 우윤은 서핑에 성공하면서 채집한 병에 담은 파도 거품을(우윤의 서핑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저자의 경험을 추측해 볼 수 있었음),

두 번째 결혼한 홍낙환의 전처의 딸이지만 시선의 사랑을 받았던 딸 경아는 생전에 시선이 좋아했던 커피를,

경아의 아들인 규림은 다이빙에 도전해 할머니 이름을 붙인 산호 다섯 개가 타히티 바다에 심겼다는 종이 증서를,

새를 좋아하는 경아의 딸인 해림은 새의 깃털을 모은 깃털 컬렉션 등을 각각 올린다.   

  

모두들 현실에서 애를 쓰며 사는 ‘시선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가지들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시선이 마티어스 유화 나이프에 박힌 팔뚝의 흉터를 갖고 있다면 화수는 협력업체 사장이 던진 염산 테러를 받아 관자놀이와 턱, 목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가 남고, 경아의 해림은 눈썹까지 붉은 모반이 있다. 이들의 흉터는 본인들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졌다. 화수에게 일어난 염산 테러 사건을 모르는 해림이 화수의 흉터를 보며 느끼는 미묘한 동질감의 공기를 통해 이들이 시선과 모두 관련되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는 이들이 가진 꿈에서도 이어진다. 시선의 “난 죽으면 새나 물고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손녀 해림의 새에 대한 애착이다. 특별히 박새과의 종류를 좋아할 정도록 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무도 그의 의도를 해득하지 못했고, 돌바닥에 깨진 그의 머리가 마지막으로 계획한 것들은 차곡차곡 실행되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 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 『시선으로부터,』, 178쪽     


마티어스의 사랑을 가장한 자살은 시선 부부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타격을 가했다. 주변 살람들이 시선 부부에 대해 조롱에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초를 다툴 정도였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깨진 판석이라든가 시선의 집 앞에 버려지는 오물, 길에서 마주치는 협박들이 폭력의 도를 넘고 있었다.      

 

화수의 협력업체 사장인 기민철이 염산 테러 후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피해자들이 민사를 시작하려던 그 시점에 욕실 수건걸이에 목을 맸다. 죗값을 정당하게 치르지 않고 내뺐다. 사실 그건 도망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셈인데, 진짜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가해를 입히는 격이 된다. 근자에 일어난 서울 시장의 자살 사태를 보면 부쩍 드는 생각이다.

피해자는 나쁜 기억들을 간직한 채로 점점 그 기억들을 증식시킨다. 그랬었기에 화수는 분해서 늘 화가 나 있었다. 잊을 수 없었기에, 그 화는 도리어 자기 자신을 해치는 데 일조를 했다.       


모던걸 심시선은 어디로부터     


웬만한 헛디딤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달들을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 『시선으로부터,』, 191쪽     


특별 기획 <모녀> 미편집본에서 명혜가 심시선을 회상하며 한 말이다. 심시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원을 이룬 여성이다. 시선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이 없었기에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한 가치관들이 시선의 몸에 장착될 수 없었다.      


가부장제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남성의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예술가의 혼을 불태울 수 있었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시선의 기원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독서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하자면 시선이 나혜석의 전철을 밟지 않고 편안하게 삶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외국이라는 공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민매방과의 만남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시선으로부터,』가 가족사 소설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시의성을 띤 사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화수의 ‘염산테러 사건’은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으로 중첩이 되고 규림이 방관한 ‘사진 합성 놀이’는 그 말 많고 탈 많은 ‘N번방’ 사건이 겹쳐진다. 또 마우어스의 자살로 시선 부부에게 해를 입힌 ‘어떤 자살은 가해였음’이 서울 시장의 자살과 포개어진다.      


하와이에서의 출발을 앞두고 비행시간이 다른 우윤을 안고 안절부절못하는 난정에게 명혜는 말한다.

“우윤이는 약해 보이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충분할 거야”라며 위로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등진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시선으로부터,』, 331쪽     


홍낙현의 딸인 경아의 다짐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심시선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음을 강조하며 시선과의 연결이 핏줄을 넘어선 확장임을 선언한다.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제2의 심시선들은 있었다. 어둠에도 굴하지 않던 시선은 존재해 왔다. 시선의 용기가, 희망의, 미래의 다음 세대들에게로 전해지길 바란다.     

 






인상 깊은 문장들이 있어 잠깐 소개한다.     

 

”기분 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125쪽     
빛나는 재능들을 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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