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의 자서전

내 고독과 슬픔은 쌓여서 한 자루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by 진순희

연필의 자서전


진순희



숲 떠나온 지 오래

갖가지로 염색한 옷을 입은 나는,

그 옛날 목탄가루에서

말끔하고 단단한 연필심까지

신분 세탁을 잘한 셈이다


갑남을녀에게 이끌려

글자를 문장을 그림을 빚었다

새 하얀 종이 위를

사각사각 소리 내어 밟으며

문인, 화가의 수족이 되었지


그러나

나의 영화도 한 시절

이제는 문구점 한 구석에

화석처럼 박혀있다

샤프펜슬과 볼펜 등쌀에 밀려

온종일 주인 눈치나 보는 중이다


먼 숲에서 잘리고 깎여 굴러온

내 고독과 슬픔은 쌓여서

한 자루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캡처.PNG 출처: https://twitter.com/blackheart_kr/status/1198797483377225728/phot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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