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독과 슬픔은 쌓여서 한 자루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진순희
숲 떠나온 지 오래
갖가지로 염색한 옷을 입은 나는,
그 옛날 목탄가루에서
말끔하고 단단한 연필심까지
신분 세탁을 잘한 셈이다
갑남을녀에게 이끌려
글자를 문장을 그림을 빚었다
새 하얀 종이 위를
사각사각 소리 내어 밟으며
문인, 화가의 수족이 되었지
그러나
나의 영화도 한 시절
이제는 문구점 한 구석에
화석처럼 박혀있다
샤프펜슬과 볼펜 등쌀에 밀려
온종일 주인 눈치나 보는 중이다
먼 숲에서 잘리고 깎여 굴러온
내 고독과 슬픔은 쌓여서
한 자루의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