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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Sep 14. 2020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2018년 1월부터 3월까지 절찬리에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거칠게 살아온 이지안(아이유 분)과 나의 아저씨 박동훈(이선균 분)과의 이야기가 주된 축을 이루고 있다. 삼 형제의 둘째인 박동훈은 결혼을 해서도 삼 형제와 주로 시간을 보내며 어울린다. 동훈의 아버지도 후계 초등학교 출신이고, 형과 형수도 동생도, 심지어 몰려다니며 가는 동네 술집 '정희네'의 주인장 정희(오나라 분)도 모두 다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

그곳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동훈은 ‘후계동 패밀리’와 뭉쳐 다녀서 아내 윤희(이지아)를 외롭게 만든다.      



탄탄한 구성과 잘 짜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이지안과 박동훈보다도 동훈의 아내 강윤희에 마음이 갔다. 마음 붙일 곳 없는 윤희의 쓸쓸한 모습은 예전의 나를 보는 듯해서 보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출처: 나무위키



우리 집 가족의 형제는 <나의 아저씨>보다도 더 많은, 자그마치 6형제들이다. 연년생에 많아봤자 두 살 터울이라 이들 형제에게 다른 친구가 필요 없었다. 굳이 밖엘 나가지 않아도 사람 수가 많으니까 모든 것을 집안에서 다 해결할 수있었다. 결혼하고 기이했던 것이 주말이면 꼭 형제들 집으로 몰려가고 어울려 다니는 행태였다. 큰 형은 한탄강에 살았는데 형제들이 여름이고 겨울이고 주말마다 한탄강 나들이를 했다.   

     


<나의 아저씨>에서 큰형 상훈은 말한다. 학교만 달랑 다녔기에 우리들은 색다른 취미도 없다고. 후계동 삼 형제들은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정희네’서 그저 술이나 마시는 것 외에 다른 즐거움이 없다. 아니 이들에게 이것만 한 즐거움이 없다. 세 식구, 우리 가족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애원하고 항변하는 윤희에게 동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 우리 가족이지라며 속없는 웃음을 짓는다.(속으로는 우리 형도, 동생도 엄마도 다 ‘나’의 가족이라고 선을 그었음이 분명하다. 단호하게 그었겠지.)   

  


자기 형제들에게, 회사 동료들에게, 지안에게 훌륭한 형제고 동료이고 아저씨였을 망정 윤희에게는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다. 결국 윤희는 남자 후배와 다른 가족놀이를 하며 마음을 붙인다. 변호사인 윤희는 동훈의 대타를 바깥에서 구하는 잘못을 범한다.      



출처-패션에디터


윤희의 헛헛한 표정을 보며 플래시백처럼 나의 지나온 삶이 되새겨졌다.

서울 토박이인 나와 다르게 우리 가족이 누리는 문화도 달랐다. 내가 학교 끝나고 와서 곧 있을 음악 퀴즈 프로그램의 답을 맞히기 위해 오빠들과 클래식 음악을 듣고 곡을 암기하고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면 우리 집 사람은 산으로 들로 친구들이랑 말 갈 데 소 갈 데 다니며 놀기에 바빴다. 방학에도  종로로 서울역으로 학원을 전전했던 나에 비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나의 가족은 농번기 때는 부모님 도우라는 방학이 있어 농사일을 열심히 했단다. '후계동 삼형제'처럼 특별히 다른 취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형제들끼리 떼를 지어 다니며, 먹고 마시는 것을 가장 즐겨하는 그가 가진 유일한 취미였다.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나의 가족은 누구를 고 다니거나 우르르 사람을 끌고 데리고 왔다.  

생전에 시어머님께서도 그러셨다.



"쟈는 학교 갔다 들어올 때 한 무대기를 끌고 들어왔어야. 쟈가 들어올 땐 마을 어귀가 시끄러웠어야."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도 항상 누군가와 몰려다녔다. 내성적이면서도 외향적인 면이 강했다. 조용한 사람이 저렇게 시끌벅적한 것을 선호하는지 도대체 성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수도 적고 수줍음이 많은 그가 행동대장처럼 뭔가를 꾸미고 계획하는 것을 도통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우리집 사람처럼 도대체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의 성격에 대해 상세하게 설파한 책이 있다.

영국 뉴캐슬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다니엘 네틀은 『성격의 탄생』에서 인간의 성격을 규명하는 다양한 심리 실험과 사례 연구를 통해 성격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외향성 extraversion과 내향성 introversion이란 말은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이 1921년 처음 사용한 용어다. 융은 이 용어를 세상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융이 묘사한 외향적인 사람은 외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사색보다 활동을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에 빠지기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움직인다.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만 몰두하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고, 고독과 평화롭게 사색하는 것을 즐긴다.

-『성격의 탄생』, 105쪽      


활동을 좋아하고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려는 나의 가족은 외향적인 사람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특히 자기  형제들과 뭉쳐 다니기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휴가를 가도 우리 가족만 가는 경우는 없었다. 10년 이상 이렇게 살았으니 이번 한 번만  제발 우리 가족끼리 피서를 가자고, 안 그러면 앞으로 당신네 집안 행사에, 어떤 모임에라도 가지 않을 거라고 선언을 했다. 잠깐 갈등하던 눈치 더니 순순히 알았다고 했다.  선선히 대답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우리 식구만 가나보다 하고 트렁크에 장본 것을  그득 고 콧노래 부르며 시동을 걸었다. 한참을 달려 강릉 쪽에 거의 다 달았을 무렵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받는 즉시 뚝뚝 끊기에 왜 전화를 안 받아요? 했더니 '응 잘못 걸린 전화야.'  하기에 약간 미심쩍긴 해도



 “그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설마 이번에도 자기 형제들을 부르겠어?
 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
 하면서 콘도에 도착했다.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했던가. 세상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 가족보다 그의 형제들이 먼저 도착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수기라 작은 평수밖에 예약이 안 됐는데, 그 더운 여름날, 그 작은 평수에 19명이 있었다.

방마다 남탕 여탕으로 나누고 거실에 한 무더기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작은 목욕탕에 목만 내놓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일부는 베란다에 슬리핑백을 깔고 거기서도 잤다. 생각도 못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시동생이 자기 친구를 불렀다는데 갓난쟁이를 데리고 왔다. 그 갓난쟁이가 밤새 잠을 안 자고 울어재꼈다. 날은 덥고 공간은 좁아터진 곳에 사람만 바글대는 아비규환도 그런 아비규환이 없었다.



출처: Pixbay




잠 잘 곳도 마땅치고 않고 정서적으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랑 있으려니 너무나 속이 상했다. 눈물이 비직비직 나오는 걸 꾹 참고 콘도 로비에 아무도 없는 소파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무리 속에서 기어이 탈출해야지. 우리 아들들은 저 속에서 빼낼 거야.
절대로 저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날 굳을 결심을 했다.      



<나의 아저씨>의 윤희가 돌쟁이 아들을 두고 공부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처럼 나도 그때 나의 신분을 세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공부!’,  그 공부를  하기로 그때 결단을 내렸다.



우리 집 가족인 그는 내 마음 안에, 순도 100% 우리 가족 안에 아무리 들어오게 하려 해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무심하기는 여전하다. 팔랑귀처럼 틈만 나면 밖에 귀를 열어두고 형제들이랑 몰려다닐 생각만하며 살고 있다.

성격이 좋으니 나쁘니를 떠나서 그냥, 그게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성격이다.



 『성격의 탄생』에서도 좋고 나쁜 성격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인류사를 통틀어 언제나 가장 좋은 성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모든 성격에는 혜택(장점)과 비용(단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생이란 자신의 성격에 맞는 ‘틈새’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성격의 탄생』, 7쪽      



동훈이 ‘후계동 패밀리’에 묶여 있듯이 우리 가족도 족쇄처럼 자기 가족에 마음이 묶여 있다.

나 역시 묶여 있으면 묶여있는 대로 살아가라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벤치마킹하며 산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늘도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를 읊조린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도 그대들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따로이듯이.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

- 『예언자』중  <결혼에 대하여>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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