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들이 섞여서 밤낮으로 춤을 추듯 떠다녔다.
코로나임에도 추석 명절이라 고향을 찾는 행렬은 이어졌다. 지금은 부모님도 다 돌아가셔서 고향에는 형제들도 안 살고 부모님 묘소만 있다. 우리 '가족'은 한 달 전부터 달력을 보며 고향 갈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추석 한 주 전에 벌초하러 고향에 다녀온 상태다.
‘고향’에는 어떤 마법이 있기에 저렇게들 가고 싶어 하는 걸까.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다.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4.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
친정아버님이 매동 국민학교를 졸업하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종로구이지만 거기서 살았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당산동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에 속한다.
당산동은 어릴 적 살던 곳이다. 그곳은 광장 같은 마당을 중심으로 골목들이 이어져 있었다.
마당에서 여자 아이들은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고 남자아이들은 딱지치기나 무등을 타며 놀았다.
여자 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면 짓궂은 남자 애가 달려와 고무줄을 끊어놓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지금과 달리 몸무게가 아주 빈약했던 나는 고무줄놀이를 사뿐사뿐 아주 잘했다. 고무줄놀이만 아니라 공기놀이도 정말 잘했다. 잘한 이유가 순전히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그랬다. 손등에 힘을 주고 쫙 피면 활처럼 구부러져서 많은 공깃돌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손등 그득히 공깃돌을 올려놓고 확 잡아채면 아이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어릴 적 놀이마당에는 언제나 소리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찡얼대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두부 장사 아저씨의 딸랑이 소리,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소리 등 여러 소리들이 섞여서 밤낮으로 춤을 추듯 떠다녔다.
우리 옆집에 영화배우 김지미 같은 새댁이 살았는데 남편은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밤이면 새댁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아마비 아저씨가 김지미 같은 아줌마를 밤마다 때렸다.
보다 못한 우리 엄마가 “요즘 매 맞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도망이라도 가지 왜 그러고 살고 있냐”라고 하면 대답이 애처로웠다. 아침이면 남편이 싹싹 빌고 다시는 안 그렇겠다고 용서해달라고 한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사람이 본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나 없으면 저 사람 불쌍해서 안 돼요.”
하면서 눈물을 찍어냈다.
저녁 무렵이 되면 광장에는 두부 장사 아저씨의 딸랑이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두부를 샀다. 딸랑딸랑 소리는 두부 장사 아저씨가 두부를 팔 만큼 팔아야 끝이 났다. 생각만큼 덜 팔았다 싶으면 어느 정도 소진될 때까지 소리가 이어졌다.
딸랑이 소리가 끝이 나면 집집마다 엄마들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골목길 사이로 엄마들의 그만 놀고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소리들이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동네나 바보 오빠나 형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바보 누나나 언니는 잘 못 봤던 듯하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다 들어가고 동네 마당이 텅 비어도 바보 칠성이 오빠만 밍기적 거리고 들어가질 않았다.
칠성이 오빠는 남자 애들이 껴주지를 않으니 꼭 여자 애들 노는 곳에서 얼쩡거렸다. 치기 장난을 할 때 깍두기로 끼워 줘도 자기편 아이를 잡아서 도리어 자기편을 지게 만들었다. 이러다 보니 칠성이 오빠를 아무도 끼워주질 않았다.
더 놀고 싶어서 머뭇머뭇거리고 있으면 칠성이 오빠네 할머니가 칠성이 오빠 앞으로 와서는 뺨을 어루만지며
“음메 내 새끼 어여 들어가야지. 어서 들어가세” 하며 데리고 갔다.
영등포를 거쳐 가는 기차가 지나갈 때쯤이면 예닐곱 되는 조무래기 아이들은 철로로 뛰어나갔다. 철로에 못을 눕혀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기적 소리를 내며 기차가 들어오면 아이들은 철로 곁에 나란히 섰다. 귀를 막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양팔을 벌리고 기적소리에 맞춰서 와~~~~ 하면서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기차가 떠나버리고 나면 얼른 철로로 뛰어가서 납작해져 뜨끈뜨끈한 못을 손에다 올려놓고 누구 못이 더 납작하고 길어졌는지를 비교했다.
나중에 도림동으로 각자의 방이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지만 올망졸망 살았던 당산동은 내게 고향 같은 곳이다. 방 하나 당 두 명 세 명이 포개서 살았지만 그곳은 정겨움이, 따뜻함이 배어있는 공간이다. 두부찌개 냄새가 올라오는 곳이고 칼국수 냄새가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당산동은 배우의 꿈을 지녔던 큰 언니의 꿈이 좌절된 공간이고 작은 언니가 꿈을 찾아 뛰쳐나간 공간이기도 하다.
내게 당산동은 소리가 살아서 숨 쉬는,
소리의 고향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