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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Nov 07. 2020

80세 현역을 향한
굿 라이프를 위하여

“그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그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천재의 의무’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음에도 살 날이 며칠 안 남았다고 통고한 의사에게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그는 세간의 눈으로 보기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철강 부호의 여덟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형 세 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만큼 그의 삶은 음울했다. 특히 배우로서 살기를 원했던 셋째 형 루돌프는 베를린의 한 술집에서 <나는 버림받았네>라는 음악을 들으며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했다. 아마도 형제 셋의 자살로 인해 자신도 언젠가는 자살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듯싶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자에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평생을 고립감에서 보내다 자신을 돌보던 베번 박사의 방에서 예순두 번째 생일이자 마지막 생일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자 친구인 노먼 맬컴의  『비트겐슈타인의 추억』에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불행하게만 살지는 않았다. 물려받은 재산을 남은 형제와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기부하고 필요한 돈만으로 생활을 했다. 가난했지만 주변에 그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얼마간의 돈과 가구 몇 가지를 갖고 살다 간 청빈한 그의 삶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좋은 삶에 부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껏 연구하고 살아생전에 학문적인 인지도도 얻었다. 철학자로서 그의 삶은 굿 라이프 하지 않았을까. 비록 현실의 삶은 진흙탕 속을 뒹굴었지만 자신이 판단하기에 멋진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비트겐슈타인을 보며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아갈까? ‘굿 라이프’하는 삶에 대한 고민은 고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으로 eudaimonia인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행복을 지칭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eu) 영혼 또는 신성(daimon)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삶’이란 내 안에 깃든 신성을 자기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연으로 인한 행운이 아니라 좋음을 추구하는 인간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을 중요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 삶'인 행복(eudainonia)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최적으로 발휘한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은 바로 이성적 사유의 ‘탁월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를 보면 행복이란 무엇을 획득하거나 성취한 사태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특성을 적확하게 발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자체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행복이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본성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왠지 거룩하게 살아야 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있다. 이에 비해 『프레임』의 최인철 교수는 『굿 라이프』에서 좀 더 친근한 방법으로 굿 라이프 하며 살아가도록 안내한다.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란 부제를 단 『굿 라이프』에서 “굿 라이프란 균형이다. 재미와 의미, 성공과 행복, 현재와 미래, 자기 행복과 타인의 행복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삶이 곧 굿 라이프다”라고 밝힌다.       

저자 최인철 교수는 서문에서 행복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좋은 기분과 좋은 삶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닌 ‘행복’이 현대인들에게는 ‘좋은 기분으로서의 행복’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저자가 말하는 "굿 라이프로서의 행복"은 좋은 기분은 물론 삶을 향한 품격 있는 자세와 태도까지를 포함한다.    


 “행복? 그딴 건 영국 놈들이나 추구하는 것이야”     



행복? 그딴 건 영국 놈들이나 추구하는 것이야라는 말로 니체는 ‘행복’과 ‘영국 사람들’을 폄하했다. 이처럼 행복에 대한 오해는 철학계의 거장도 비껴가질 못했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 자신도 행복을 안락함 정도로 곡해했다.

행복이란 단어를 사전 찾아보면 행복(幸福) 「2」에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실려있다. 행복이라는 한자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 행복의 조건을 지칭하기에 오해가 생겨났다.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 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굿 라이프』, 48쪽



행복은 부정적인 감정이 완벽하게 배제된 상태를 의미하는가?

저자와 관련된 연구팀은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행복에 다가갔다. 연구팀은 2번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행복감이 낮았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통 기피자들이 고통을 경험하면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행복은 고통의 완벽한 부재가 아님에도 고통 기피자들은 고통스러운 일이 예상된다면 애초부터 피하려고 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원할 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변화 가능성이지 유전율이 아니다. 

-『굿 라이프』, 67쪽      



자자의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행복을 향한 노력” 이 비록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긍정할 줄 아는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출처: Pixabay



내가 생각하는 굿 라이프     


사실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또 ‘무엇을 이루었는가’는 개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 맺음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한몫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처럼 언뜻 보기에 불행한 삶을 살아간 듯해도 본인 스스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판단한다면 좋은 삶을 산 것은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스스로 발전시키며 이성적 사유로 탁월성을 발휘해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도 고차원적인 좋은 삶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맨 오브 라만차”의 대사처럼 도전하는 삶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내가 느끼는 행복은 기분이 좋은 상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 소명의식을 갖고 주변을 잘 되게 하는, 이를테면 공동체에 기여하는 목적이 있는 삶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을 향유하고 성찰하며 나만의 기준을 갖고

주변을 이롭게 하며 도전하는 삶,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다.


80세 현역으로 굿 라이프 하기 위한

도전하는 삶은 오늘도 계속되는 현재 진형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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