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순희 Nov 09. 2020

그날, 라흐마니노프가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아영을 낚아채고 있었다.

     

10월의 끝자락이다. 아영은 코트 깃을 세우고 가로수 길로 나섰다. 가로수 길은 집에서도 가까워서 아주 친근하다. 가정집을 개조해 카페로 만든 가게들이 즐비해 있는 것도 좋았다. 젊은 친구들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어 시간만 되면 달려 나가는 곳이다.     



점포 앞 행거에 옷을 걸어놓은 데도 있고 매대에 옷을 쌓아놓은 가게도 눈에 들어왔다. 슬쩍 슬쩍 지나치는데 작은 가게 앞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아영의 발이 멈칫했다. 라흐마니노프였다. 맞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아영의 기억은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갔다. 그때도 라흐마니노프가 있었지. 

아영의 고향은 지방의 소도시 Y 읍이었다. 큰고모의 주선으로 Y 읍의 남자를 만났었다.

면 소재지에 예식장을 갖고 있는 방앗간 집 막내 아들이라고 했다.   


   

아영아, 니는 그 집에 시집만 간다면 굶을 걱정은 없대이. 누나들이 다섯인 게 걸리긴 해도 마, 다 좋은 게 어디 있겠노. 머시매 인물도 좋고 착하다카더라. 대학도 나오고. 한 번 내려오그래이.     



그렇게 해서 만난 남자였다. 고모가 말한 대로 시골 남자답지 않게 피부가 하얬다. 마른 데다 목이 길어 신화 속 아도니스 같은 모습이었다. 목소리마저 폭신하니 듣고 있으면 카스텔라를 씹는 듯했다. 수줍어하면서도 아영이가 마시게 좋게 커피잔을 돌려놓을 줄 아는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말을 하는 쪽은 아영이었고 주로 그 남자는 듣는 쪽이었다.   


   


매번 아영이 Y 읍으로 내려가서 만났다. 그 남자가 그걸 원했다. 서울 소식을 듣고 싶어 했고 서울 여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영이 그 지역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는 두 번 만났을 때 결혼 이야기를 했다. 가족들이 결혼을 서두른다고 말하면서 아영의 눈치를 살폈다. 아영도 그 남자가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동생들이 걸렸다. 아영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일찍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터였다. Y 읍에서 벌어먹고살 일이 없었다. 서울에 와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영의 엄마가 제과 공장에 나가서 일했고 아영이 역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직했다.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하며 여동생 둘을 두 여자가 먹여 살리고 있었다.      



당장 결혼하면 동생들 학비랑 생활비는 어쩌지 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얼른 돌렸다. “바로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전 아영 씨 기다릴 수 있어요.”

그 남자는 아영이 묻지도 않은 말을 서둘러 내뱉었다. 


     

그 정도까지 진행된 터라 아영은 Y 읍으로 내려가는 시외버스를 타며 생각에 잠겼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이번 가을이 아니라 내년 봄, 아니면 내년 가을로 미룰까 하면서 버스를 탔다. 

생각에 잠기다 창밖을 내다보니 가로수마다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유독 플라나타스의 벌레 먹은 낙엽들이 춤을 추듯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플라타너스 나무에 붙어있는 나뭇잎 역시 벌레가 먹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가자 그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어색한 듯 웃으며 잘 지냈어요? 한다. 

고모를 통해 급히 보자고 한 이유가? 아영이 묻자

뜸을 들이다가 음, 음 헛기침을 하며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이곳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눈을 못 맞추고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 하면서 어렵사리 말을 하고 있었다.     



아영은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왜죠?”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골 다방에 어울리지 않게 라흐마니노프가 흐르고 있었다. 나락의 늪으로 안내하듯 라흐마니노프가 아영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 남자의 말에 기울였다. 오솔길을 걷듯이 호른이 피아노와 함께 잔잔하게 아영을 데리고 갔다. 


“바보 같은 인간아 그따위 이야길 하려고 6시간이나 걸리는 이곳에 나를 오라고 했단 말이야?”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찰나에 피아노가 격정적으로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청아한 클라리넷 소리를 들으며 “아니지, 소개한 고모를 봐서라도 우아하게 마무리를 해야지”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전화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영 씨를 직접 만나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 뒤로 그 남자가 사랑한다고, 아니 사랑했다고 했던가? 아영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남자의 말을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아영은 일어섰다. 너무 간단하게 끝낸 이별에 당황한 남자가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나섰다. 아영은 뒤를 돌아 배웅할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들어서 막았다. 지하 계단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안까지도 피아노의 선율이 아영을 따라 나왔다. 심장에 못된 벌레 하나가 들어와서 파먹은 듯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늪에서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려 시외버스정류장으로 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 채 서울에 도착하니 고모가 노발대발하며 아영의 아버지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머슴애 집에서 아영이 니가 싫단다. 가난한 집 맏딸한테 당신의 막내아들을 못 주겠다고 누나들이랑 그 집 어매가 발 벗고 나섰단다. 사내 자슥이 유약해 빠져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여자들 등쌀에 그만 손을 들었단다. 넋 빠진 놈이라며 고모는 분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큰고모는 아영의 아버지 동생이었는데, “오빠가 무능하니까 딸내미 혼삿길꺼정 막는다”고 “아영아, 너무 실망하지 말그래이. 더 좋은 남자 또 올 끼다. 인연이 아이다고 생각하그라”하며 전화를 끊었다.     



“가난한 집을 맏딸한테는 절대 장가보낼 수 없다”라는 말이 송곳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아영은 회사만 다녀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생각에 남대문 시장에서 점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옷을 떼다 파는 거랑 단골 관리하는 것 등을 배우며 시장에서의 생존 전략을 익혔다. 그곳에서 만난, 아영이처럼 고구마 줄기 같은 가족이 딸린 남자랑 결혼을 했다.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도매 손님을 받고 점심 먹고 나서는 소매 손님을 받으며 미친 듯이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남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두 딸에게는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이젠 다 잊은 일이었는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아영을 낚아 채고 있었다.


 

출처: Pixabay


작가의 이전글 나무 불면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