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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루즈에서 춤을*

물랭루즈에서 강남 포장마차까지 흘러온 춤, 착지하지 못한 우리의 꿈들

by 진순희
캡처-물랑루즈.PNG 툴루즈 로트렉- <물랑루즈에서의 춤> 1890, 캔버스에 유채, 116x150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물랭루즈에서 춤을*


이영식



고층빌딩 사이 뛰어내린 눈발
착지할 곳 몰라 골목길 기웃거린다
이력서 내는 짓도 이력이 난 우리는
어깨 위 분분한 눈송이를 몰고
포장마차 꼼장어 연기 속으로 들어섰다
물랭루즈에서 서울 먹자골목까지 흘러온
금발머리 여자, 한 해의 마지막 장
달력 안에서 춤추고 있다

늙은 주모의 手話처럼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가고

내 몸을 열어봐, 육천 원이야!
긴 머리 여자가 백열등 불빛에 흔들리며
半裸의 어깨를 무기로 쏘아본다
우리는 그녀의 날갯살과 똥집을 추가했다
소주 몇 병과 씨름해도 취하지 않는 밤
빨간 스타킹의 관능과 검게 탄 막창을
씹어 넘기고 거리로 나섰다
폭설,

가락국수처럼 뚝뚝 끊기는 길
덜미 잡힌 차량들이 한 켠에 주저앉는다
속도보다는 바람의 결을 느껴야 할 시간
물랭루즈에서 강남 포장마차까지 흘러온
춤, 착지하지 못한 우리의 꿈들이
건너편 암소갈비집 겨울나무 가지에
한 움큼씩 알전구를 물고 있다

―시집 『공갈빵이 먹고 싶다』에서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의 판화 작품

―『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편의 시』 수록(이승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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