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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Dec 16. 2020

『치료의 선물』이 주는  “읽었으면 무조건 써라”

지금-여기에 집중하는 관계의 미학

진단이 예단이 되지 않으려면     


동네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민영이 어머니께서 상담을 오셨다. 지혜롭기가 선덕여왕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소리를 다른 학부형을 통해 이미 들은 터였다.


학부형들이 상담을 오면 우선 아이들의 단점부터 말을 하며 하소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휘력이 부족하다든지, 머리는 있는 데 노력을 안 한다든지(26년 학원 하는 동안 이 레퍼토리는 정말 바뀌지 않고 듣는 소리다), 공부하는 꼴을 못 봤다든지.

요즘은 스마트폰과의 전쟁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스마트폰에 중독이 된 거 같다고 아무래도 어디 가서 치료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고민들을 한 가득씩  풀어놓기가 일쑤이다.    


 

혜은이 어머니 소개로 오셨다고 했다. 이미 혜은이 어머니께 민영이 성적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학원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지금은 내신 대비 기간이니까 집에서 공부할 과제가 많을 거라며 안내를 했다. 만일 숙제를 못해 오거나 하면 한 번 더 불러서 학원에서 숙제를 하게 할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민영이 어머니는 찬찬히 다 듣고 나더니 나지막하게, 군더더기 없이 말을 했다.



우리 민영이가 숙제는 제대로 해올 겁니다. 책임감이 있는 아이거든요.
아직은 어리지만 곧 제 앞가림할 겁니다.
선생님 신경 쓰시지 않도록 제가 관리를 잘하겠습니다.
 하면서 일어섰다.    

 


민영이 성적은 70점 대였다. 그 정도면 근심이 될 만도 할 텐데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성적이 겸손한 아이들 둔 엄마 치고는 담담했다. 오히려 말을 참지를 못하고 내뱉은 건 내 쪽이었다.


민영이 어머니께서 아이를 믿고 큰 그림을 보시니 좋은 성과 있을 거라고, 최선을 다해 흡족한 결과를 만들겠다고 마무리를 했다. 

나가려다가 민영이 어머니께서 다시 앉았다. 무슨 말을 잘못했나 해서 의아해 하며 쳐다봤다.     


민영이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띠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어디 가서 상담할 때 우리 아이의 단점을 절대 말하지 않아요. 첫 아이 키울 때는 멋모르고 학교에 가서 미주알고주알 아이의 부족한 점을 다 말을 했지요. 하다못해 단점을 전시하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


담임 선생님께 내 아이의 고쳤으면 하는 부분을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 아이를 성실하지 않은 애, 시간관념이 없는 애로 진단을 내리고 아예 단정을 해버리더군요. 

심지어 다른 과목 선생님께도 말씀을 드려서 우리 아이를 예단하게 만들었어요. 결국 내 아이만 우습게 됐어요. 그 뒤로는 절대 학교고 학원이고 교회에 가서도 내 아이의 단점을 말하지 않게 됐어요.     


 

우리 아이의 단점을 말한다고 해서 개선되고 달라진다면 얼마든지 하지요.
우리 집 일은 우리 가정 안에서 해결하고 제 선에서 끝내지요.
그게 저의 '신념'입니다.     


'신념'이라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신념이라구?

상담하면서 ‘신념’이라는 단어를 단호하게 말하는 분은 처음이었다. 혜은이 어머니 말마따나 좀 다르긴 했다.

혜은이 어머니는 내 딸이 민영이 정도 성적이 나오면 울화통이 터져서 걱정이라도 하고 푸념이라도 늘어놓을만한데 민영이 어머니는 절대로 그러질 않는단다. 속이 터질 법도 할 텐데 자기 아이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나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며 민영이 엄마가 좀 다르긴 해요.

우리 같은 범인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대인배지요 하면서 실눈을 하며 웃었다.





어빈 얄롬 Irvin D. Yalom의 『치료의 선물』에서도 치료자는 내담자를 섣불리 ‘진단’ 하지 말라고 한다.

“보험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진단을 내리지 말라”라고 조언한다.      



물론 진단이 정신분열증, 양극성 장애, 주요 정서 장애, 측두엽 간질, 약물 중독이나, 약물이나 퇴화, 또는 감염으로 인한 기관 및 뇌의 질환처럼 생물학적인 기질과 관계된 여러 심각한 질병을 위한 치료에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보다 덜 심각한 정도의 내담자를 위한 일상적인 심리치료에서 진단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치료의 선물』, 4쪽     



얄롬 박사의 의견을 들어보자.

심리치료는 오랜 기간에 지나서 내담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치료자의 서투른 진단은 시야를 가로막게 한다. 진단을 내리고 나면 특정 진단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은 간과하기 쉽다. 선택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됨은 물론 초기 진단에 확신을 줄 수 있는 미세한 부분까지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만일 내담자를 “경계성 장애” 또는 “히스테리” 환자로 규정지었다면 내담자를 만나는 것 자체에 이미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특성들을 내담자에게 자극하고 지속시킬 우려가 있다. 때 이른 진단은 자기 충족적 예언의 기능을 하기도 한단다.     



역자 서문에 보면 심리상담과 관련된 책들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부분이 인간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Freud는 5세 이전의 경험이 평생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을 리비도라는 무의식 속에 있는 심리성적 에너지로 설명하고 있다.

행동주의 학자들은 환경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자아실현에 대한 동기를, 체계론적 입장의 관점을 갖고 있는 상담가들은 체계(system)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한다.      




출처: Pixabay



지금-여기, 토끼의 귀 발달시키기     



어빈 얄롬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치료하고자 한다. 실존주의적 심리치료의 접근은 실존의 “주어진” 것에 대한 직면에서 시작된다. 죽음, 고립, 삶의 의미, 자유 같이 “주어진” 궁극적 관심사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치료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여행의 동반자”로서 내담자의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어느 한 이론만 중시하는 분파주의보다는 몇 가지의 다른 치료적 접근의 치료적 다원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함은 물론 “지금-여기(here-now)”에 집중하게 한다.      



지금-여기는 ‘대인관계의 중요성과 치료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이론적 토대에 기대고 있다.

‘지금-여기(here-and-now)’는 치료 시간 안에서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즉각적인 사건”을 뜻한다. 치료시간에 일어나는 지금, 이 순간에 관계된 것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내담자의 과거나 외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덜 강조한다.      



지금-여기를 강조하는 얄롬 박사는 내담자의 과거사와 무의식에 집중하는 정신분석 치료라든가 전문성을 내세우는 현대 정신의학의 치료체계와도 거리를 둔다.

지금-여기는 상담이나 치료가 치료자나 내담자 사이의 진솔한 만남이 가능해질 때 그 목표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내담자를 편견 없이 수용할 때 ‘환자와 치료자’라는 거리감을 극복하고 투명한 관계를 맺는다.      



민영이 어머니와 상담하면서 민영이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알게 된 것은 아직 어리지만 제 앞가림은 분명히 할 아이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민영이랑 수업하면서 ‘지금-여기’에만 몰입하다 보니 민영이의 부족한 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니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이가 말하는 것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 보니 민영이 역시 공부에만 몰두를 했다.


 

공부 못하는 아이로 진단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투명하게 봄으로써 “참 만남”의 기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민영이를 바라보게 되니 민영이와의 수업 시간은 활력을 잃지 않고 겉돌지 않았다. 단연 좋은 관계를 맺게 되니 학습의 결과물 역시 바람직하게 나왔다. 지금-여기에 집중하는 관계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치료의 선물』은 얄롬 박사가 그의 45년의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70세 때 쓴 책이다.

70세라니!

70세 노익장의 학문적 성과에 경의를 표하며 읽는 내내 자세를 바로 잡았다. 

70세라는 나이에 자극받아 이 책을 읽으며, "읽었으면 무조건 쓴다"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출처: Pixabay



제 책이 출간됐습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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