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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Feb 21. 2021

한 남자랑 40년이나 살았다

오늘이 결혼한 지 40년 되는 날이다.

아이구 징그럽게도, 그러고 보니 한 남자랑 오래도 살았네. 신랑은 결혼기념일이 뭔 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게 기념일 따지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은 얼마 안 있어 쪽 나는 부류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아주 옛날 사람이다. 말을 안 해도 묵은지처럼 그저 서로 믿고 사는 게 부부라고 자기 마음대로 예단하며 사는, 정말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이다.

글쎄, 이런 남자와 사는 나는 몇 번의 우여곡절도 없이 잘 살아왔을까? 생각해보니 갈등이니 뭐니 별로 그런 생각도 없이 살아왔던 듯싶다.    


반대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그것도 이 남자랑 결혼 못하면 죽을 것처럼 한 결혼이었다. 수면제를 털어 넣고 난리를 치고 한 거사였다. 무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냐마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버려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젊은 날 호기롭게 한 선택의 대가를 살면서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못 돌아갈 것도 없었다. 남의 말은 한 달도, 아니 사흘도 못 간다는 말도 있으니 눈 질끈 감고 원위치시켜도 됐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슈만의 부인이었던 클라라처럼 내가 선택한 사랑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견뎌냈다. 그때는 그게 뭐라고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때는 뭘 몰라서, 치기 어린 마음에서 남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고 굳게 믿었던 듯하다.     

  

클라라가 그랬던 것처럼 내 결혼생활도 평온하지 못했다.

일단 우리 집 남편은 돈 버는 데 재주가 없었다. 아니 돈 버는 것을 아주 어려워했다. 그저 사람만 좋았다. 오죽하면 “물러 터진 내 아들하고 살아내느라 에미 네가 욕봤다”라고 시어머님께서 유언처럼 하시고 가셨을까.     

일을 하면 견적서를 내고 수금을 제대로 해야 하는 데, 그 수금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뼈 빠지게 일을 하고도 대금을 못 받아서 허구한 날 내용증명이나 보내며 씩씩거렸다. 그런 날은 분해서 밥도 잘 못 먹었다. 상대편을 욕하다가 끝내는 자기가 등신이라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내용증명서를 하도 써서 지금은 다른 사람 내용증명 보내는 것을 뚝딱 잘도 써낸다.      


수금을 아주 다양한 형태로 못해 와서 나를 힘들게 했다.

서울 토박이인 나에 비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의 출신인 남편은 초등학교 동창회도 자주 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초등학교 동창회는 차치하고라도 중학교 동창회조차도 안 하고 있다. 사회성이 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고등학교 동창들 모임도 하나뿐이고 그것도 열 명 남짓이다. 누군가와 끈끈하게 관계 맺고 하는 것에 서툴기도 하거니와 피로감을 많이 느껴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산다.   

    

국어 교사들 모임에서 8년 아래 서울 출신 P선생이랑 20년 이상 알고 지내왔다. 카페에 새로 들어온 P선생과 동갑내기 L 선생이 만나자마자 나이를 트더니 그때부터 내게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른다.      

P선생이 “제가 이상한 가요? 저는 선생님께 그 오랜 세월 동안 ‘언니’라는 소리를 못했네요. 사근사근한 L 선생이 부럽네요.” 하면서 전화를 했다.       


아이구 무슨 소리예요. 서로 가르치고 살아가고 있는 입장에서
‘언니’는 무슨.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저는 누구랑 엎으러져서
친하게 지내는 거 잘 못해요. 그런 거는 나 스스로가 피곤해 해요.
지금 해왔던 것처럼 지내요.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인간관계에 약간의 거리를 둔다. 이런 나와 달리 남편은 수줍어하면서도 모임이란 모임은 다 찾아다니며 참여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남편의 이름을 대면서 ‘00이 여자 친구’라는 전화가 왔다. 내 남편의 여친은 자기들의 관계에 대해 기나긴 설명을 했다. 시골에서의 내 남편과의 추억을 길고 지루하도록 오래 말을 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한참이나 들어야만 했다. 전화한 용건이 결국엔 이번 토요일에 ‘00네 집’인 우리 집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놀러 가도 되냐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바깥에서 자기들끼리 약속을 다 해놨던 모양이었다.     

 

다른 건 다 어설퍼도 우리 남편은 노는 것 하나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친구들 불러서 노는 데는, 어쩌면 그렇게도 창의적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창의성 지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다. 속전속결로 사람 만나서 먹고 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남편의 여친은 전기장판을 만드는 아주 나이 많은 사업가랑 결혼을 했는데 우리 남편한테 카탈로그 제작을 의뢰했다. 전기장판 공장이 포천에 있어 일을 빙자해 포천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카메라 장비를 차에 싣고 촬영을 위해 수도 없이 그곳을 다녔다. 수금은 못해 와도 이동 갈비를 먹고 난 뒤에 막걸리는 꼭 챙겨 왔다.

    

수금을 해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내게 남편이 느닷없이 돈 얘기를 했다. 촬영한 것을 인쇄해 카탈로그를 만드는데 인쇄비 조로 내게 오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듣다못해 어이가 없어,      

당신의 그 잘난  여자 친구 정숙 씨한테 중도금을 달래서 인쇄비를 대면되지 왜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하냐고 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정숙이가 나 보고 먼저 다 내래. 그러면 자기가 한 번에 다 비용처리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 돈 좀 대주라.  


아니 정숙 씨 남편이 하는 사업체가 짱짱 하대며요? 사업하는 사람이 꼴랑 돈 오백이 없어서 당신 보고 대납을 해달라고 해요? 느낌이 안 좋아요. 중도금 안 주면 타절 한다고 하세요.
이런 식으로 하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해요.

내친 김에 한 마디 더했다.


일 하고 계산을 깔끔하게 못하는 것이 영 회사가 미덥지가 않구먼. 정숙 씨한테 중간 정산해줘야 진행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해요.     



남편이 발끈해서 내게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어째 인정머리가 그렇게 없어. 정숙이가 재혼했는데 그 영감 큰 아들이 정숙이랑 동갑이래. 공장에 큰 아들이 나와서 자기 아버지 재산 말아먹을 까 봐 눈을 벌겋게 뜨고 진을 치고 있대. 정숙이가 얼마나 난처하겠어.  

     

너무나 황당해서


아니 그 아들 말 맞다나 재산 빼돌리는 거 아닌데 난처할 게 뭐 있어요? 광고전단지 만들고 카탈로그 제작하는 거잖아요. 광고비 들어가는 건데 전실 자식 눈치 볼 일이 뭐가 있대요?      


콧방귀도 안 뀌고 있었더니     


이럴 때 보면 너는 진짜 독해. 사람이 어쩌면 냉혈동물 같으냐? 너는 정숙이가 불쌍하지도 않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호칭도 ‘당신’에서 ‘너’로 바뀌더니 나중에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냉혈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마당에 잘됐다 싶어 “아무튼 정숙 씨한테 다시 한번 말해요”    

  

그러고 일단락을 지었다. 정산도 못하는 것을 보니 왠지 깔끔하지 못하고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확히 3일 있다가 남편이 당장 통장으로 오백만 원 부쳐달라고 애원을 했다. 인쇄소에서 수금해 달라고 닦달을 하는데 못 살겠다며 풀이 죽어서 말했다. 자기가 보증을 설 테니 이번 한 번만 당신 돈 좀 쓰자고 했다. 수금하는 대로 더러워서라도 바로 니돈부터 먼저 갚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송금을 했는데, 그 뒤로 전기장판 회사는 문을 닫아버렸고, 정숙 씨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허접한 전기장판 한 장만 우리 집으로 배달이 오고 그걸로 끝이었다. 동창회에서도 다시는 정숙 씨를 볼 수가 없었다. 오백만 원짜리 장판은 아직도 거실 바닥에 우리 집 유물로 그대로 누워있다.   

   

출처: 우리 집의 유물인 500만원짜리 장판도 이와 비슷하다




사주를 봤더니 남편은 손가락 사이로 재물이 빠져나가는 운이라고 했다. 형제 덕도 없고 오로지 마누라 덕과 자식 복만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주를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 들긴 하다.   

   

추석날이 임박하면 어느새 마음 한 구석에 찬바람이 들어오면서 쓸쓸하다. 결혼하고 첫 친정 나들이에 보란 듯이 배 한 궤짝과 갈비를 사들고 들어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친정은 부자는 아니어도 자전거포와 오토바이 센터를 해서 언제는 현금이 넘쳐났다. 먹는 것은 최고급으로 먹어서 엥겔지수가 아주 높았다. 게도 짝으로 사 와서 찜을 해 먹었다. 특히 갈비찜을 잘해 먹었다. 커다란 가마솥 같은 솥단지에 갈비찜을 자주 했다. 야채도 아주 조금만 넣고 갈비로만 찜을 했다.



그런데 그 수금을 못해서 단돈 몇만 원을 빌려서 친정으로 가야만 했다. 친정 문턱을 들어설 때의 나를 향한 그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친정 올케와는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명색이 대학물 먹은 나의 행색이 너무도 초라했다. 집안에서 큰오빠랑 막내인 나만 공부를 좀 했다. 그 공부 잘한다고 집안에서 기대했던 딸이 배 한 박스도 못 사들고 사과 한 상자 달랑  들고 들어서는 꼴이란!


다른 집과 달리 나의 친정 엄마는 막내딸로 곱게 자라서 그런지 남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올케의 황망해하는 시선이랑 친정 엄마의 혀를 차던 모습이 바람이 불 때면 다시 수면 위로 부상을 한다. 너무도 기억이 생생해 떨쳐버리고 싶은데 그럴수록 아픈 기억으로만 자리잡는다. 명절에 불던 것과 같은 찬바람이 스칠 때면 그때 생각이 나서 마음 한 켠이시려지면서 아주 어렵다. 한 겨울 들판에 어린 신부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여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가난한 내 친구도 결혼 25주년에는 20일씩 호주 여행을 갔다 왔고, 궁핍한 남편 부부도 캐나다를 15일씩이나 다녀왔단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년 코로나에, 큰 아들이 학원 너무 오래 했으니 이제 정년식을 갖자고 했다. 퇴임 기념 겸 결혼기념일에 맞춰 미국 여행 티켓을 끊어줬다. 2월 21일을 끼워서 여행 계획을 잡았는데, 코로나로 4월로 연기를 해야만 했다. 4월에는 여행사 측에서 모객이 안 됐다고 거절 통지를 해왔다. 5월에는, 기억하기도 싫지만 코로나 19로 그때부터 발이 묶였다.      


우울증과 난봉꾼인 슈만의 사후 클라라는 슈만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연주함으로써 그를 알리는 데 지대한 공을 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슈만을 위대한 작곡가로 만드는 편을 택했다.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교수는 클라라의 이런 태도를 ‘과잉 정당화 over-justification으로 진단했다.   

  

똑똑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곀는다고  했다. 그러기에 자신의 선택에 정당화를 해야만 했단다. 아무리 힘들게 이룬 과업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접어야 하는데 스스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안 된단다. 클라라는 기꺼이 슈만의 그늘에 살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몸을 바쳤다.

       

40주년 결혼기념일에 내 남편은 슈만 같은 작곡가도 아니니 나는 그저 밤을 새워서 글을 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소소하게 복수를 한다. 그저 브런치에 써버리는 것으로,  나는 과잉으로 정당화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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