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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Sep 16. 2021

후각, 그 환상의 세계로: 『후각과 환상』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강신재 소설 『젊은 느티나무』 중에서     


뮤슈 리의 아들 현규.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냄새와 관련된 것을 떠올리다 보면 항상 이 문장부터 생각이 났다.  

여고생 숙희는 엄마와 재혼한 교수 뮤슈 리의 대학생 아들인 현규에게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한데, 그에게서 비누 냄새까지 난다고 해서 당시 여고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현규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분명 ‘다이얼 비누’ 일 거라며 오빠들이 다이얼 비누로 머리를 감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다이얼 비누 냄새가 나는 듯하다.     

이렇듯 ‘후각’은 시간이 지나도 뇌에 각인되어 있다.


“후각은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원시적이고 신비한 감각”이라고 『후각과 환상』에서 한태희 작가는 말한다.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3부로 구성됐다. 되어 있다.

Ⅰ부 <향의 기원>에서는 중동 & 북아프리카를, Ⅱ부 <향의 진화>에서는 유럽을, Ⅲ부 <향과 나>에서는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프리카부터 유럽, 아시아를 망라한 전 지역의 냄새를 추적한다는 데에 있다.  공간의 범위가 넓기도 하지만 오만의 니즈와 Nizwa의 골목에서 나는 유향 연기까지 언급한다. 유향 연기의 냄새를 “낙엽이 타는 듯, 후추같이 알싸한 향”이라고 말할 정도로 표현이 아주 섬세하다.

이 책의 제목을 따온  <후각과 환상> 편에는 후각으로 인한 환상의 경험을 썼다. 저자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정어리떼의 비릿한 냄새를 맡는 기묘한 체험을 한다.      


멀리 거대한 은빛 덩어리가 꿈틀거린다. 바닷속 15m, 오후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정어리 떼는 타원형에서 갑자기 기이한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꾼다. 돌연 사라지더니 내 왼쪽에 다시 나타난다. 유령이 춤추듯 그 비현실적 모습에 나는 완전히 빨려 들고 만다. 절벽에 붙은 산호가 맹렬히 빛을 뿜어내고 내가 뱉는 물방울 소리가 신비하게 울린다. 헐떡거리다 문득 낯선 냄새를 느낀다. 정어리 냄새? 하지만 내 코는 어깨에 멘 공기통에 연결돼 있으니 이는 후각적 연상이나 환상에 가깝다.

『후각과 환상』, 153~154쪽     



한태희 작가는 후각적 체험이 감정이나 욕망에 얽혀 영향을 준다고 봤다. 또 반대로 감정의 흐름이 오히려 후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수면 중에도 후각 기관으로 냄새를 인식해 생리 현상에까지도 영향이 미친다”라고 논했다. 후각이나 감정, 욕망이 수면이나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한태희 작가의 말마따나 ‘후각은 환상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물 위의 세계는 다시 시각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코로나로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예기치 않게 냄새에 민감해졌다. 기분 좋게 하는 향기도 있고, 코를 쥐어 막게 하는 냄새도 있다. 후각에 집중하게 된다.


“세상의 냄새를 좇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 될 것이다.
태곳적부터 아로새겨진 감각의 기억 속, 이따금 향기와 악취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하면서.”    
   

프롤로그에 있는 말인데, 『후각과 환상』으로 새로운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데, 아프리카부터 구룡반도 한가운데 지역의 몽콕 Mongkok까지 눈으로라도 달려볼 것을 권해 본다.    

출처:『후각과 환상』,  224쪽



 본 서평은 성장판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았지만 서평은 저의 주관적인 감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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