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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Dec 16. 2021

제가 죽일 놈이죠

직전 보충을 하면서 예상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내일이 역사 시험인데 경태가 아예 기본적인 것도 몰랐다. 채점하는 것을 보니 우수수 시뻘건 장대비 투성이었다.      



비가 내리네, 비가 내리고 있어. 참말로, 이게 무슨 일이라요?

이 쉬운 것을 틀리다니? 아이구 이 사람아, 어쩜 좋아.    


 

경태가 뻘쭘해서 나를 쳐다봤다. 틀려도 너무 많이 틀렸다 싶었나 보다.    

  

아구~~~ 이 사람아 ~~

문제에 힌트가 있잖아. 힌트! 문제를 잘 읽어.  <보기>도 잘 봐야 돼. <보기>가 기준이잖아.


           




19.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인물로 옳은 것은?    

                     

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하는 동유 운동을 전개하였다.

 프랑스로부터의 독립과 입헌 군주제 수립을 지향하는 베트남 유신회를 결성하였다


카르티니      라마 5호세 리살     판보이쩌우     압둘 하미드 2     

   -<알찬 기출문제집 역사 중등 1-3호> 발췌          






19번은 베트남의 판보이쩌우에 관한 내용이다. 박스 안의 설명에도 있듯이 판보이쩌우는 청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받아 베트남 유신회를 조직해 동유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경태가 답 체크한 것을 보니 ①번의 ‘카르티니’에 떠억하니 표시가 되어 있었다.     

 

웬, 카르티니?     

 

‘무솔리니’로 하려고 했는데, ‘무솔리니’가 없어서 ‘카르티니’로 했어요.

이거 답, ‘무솔리니’잖아요? 무솔리니!     


아니, 이 사람앗! 시대가 다르잖아. 지역도 다르고.     


판보이쩌우는 제국주의와 관련해 국민운동을 펼친 거고 무솔리니는 파시즘과 관련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온 거잖아.      


하도 답답해 내신 대비해 주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내가 최고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너희들 수업하기 위해서 수험생처럼 교과서 암기하고 정리하고, EBS 강의 듣고 강남 인강 듣고 엠베스트까지 듣고 있다고.  듣고 정리한 다음에 가르쳐.

쉴 때도 유튜브에서 세계사 관련 강의 모조리 다 찾아서 듣고 있지. 시험 범위와 관련된 것은 모두 말이야. 너희들이 세계사를 쉬우면서도 재미있게 접근하도록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샅샅이 찾아서 공부하고 있어.

      

문제집 말고도 시험대비 자료는 또 얼마나 잘 챙겨 주게. 교과서도 목차별로 소제목부터 다 워드 쳐서 교과서 완전히 장악하도록 프린트물 나눠주고 그렇게 했잖아. 나도 너희들처럼 거기다 다 채워 넣고. 차곡차곡 단계별로 공부하고 정리한 다음에 내가 자네들을 가르친 단 말이닷. 


수업 들을 때 무지 쉬웠잖아. 경태, 네가 이해도 잘했고. 그렇게 했으면 외우는 거는 너의 몫이잖아. 근데 이렇게 하나도 안 외우고 나서 시대 구분도 못하면 곤란하지. 쌤이 표에 구분해서까지 다 그려 줬지. 그림도 보여주고 대단원 마무리에 있는 사진 하나하나 다 설명했잖아. 교과서에 그림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교과서에 있는 그림이나 도표, 조그맣게 참고 글이 있는 것도 전부 다. 이것들이 모두 교과서 본문이랑 연결되는 거라 꼼꼼히 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잖아.

수업 끝나고 잠들고  나서 몇 시간만 있으면 시험 보러 갈 사람이 이렇게 기초가 부실해서 어떻게 하냐.      

최선을 다하는 쌤이랑 최고의 부모님이 계시잖아. 네게 최대한으로 지원해 주시는 부모 만나는 거 큰 복이야. 큰 복!      



갑자기 경태가 머리를 싸매며 소리를 쳤다.


제가 죽일 놈이라구요, 죽일 놈!  으 아아악 ~~


연기하듯 벌떡 일어나더니 한 번 더 부르짖었다.


제가 죽일 놈이라구요!


아이들이 키득거리고, 경태도 웃었다.



저 연극영화과 가도 되지 않을까요.
와~ 내가 봐도 나, 진짜 연기 잘하는 것 같다.     

 


경태가 아무리 우스개 소리로 했어도,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는 거라 마음이 쓰였다.        


경태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아니고 학습력도 좋잖아. 배운 걸 바로 이해할 정도로 이해력이나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친구잖아. 근데 그렇게 노력을 안 하면 어떡해.      


아 그러니까요. 제가 죽일 놈이라구요. 제가 죽어야 됩니다.

아 몰라 몰라 몰라. 난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릴 거야아 ~






경태의 “제가 죽일 놈이라구요”를 듣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피로사회』의 ‘자기 착취’가 떠올랐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수감자들)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 우리는 후기 근대에 신경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젤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젤 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피로사회』, 43~44쪽     


     

『피로사회』는 첫 문장부터 무게감이 있게 다가온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저자 한병철 교수는 ‘성과사회’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인한 진화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자본주의 특성상 큰  성과는 더 큰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대분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보았다. 개인의 욕망을 종용하기에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고 주장한다.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믿는 한 자기 착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경태 스스로 자신을 봐도 부모님도 최선을 다해 자기를 뒷받침해주고 학원에서도 최고의 서비스로 준비를 해 주는데도 남는 게 없으니 결국은 자기 자신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자기 징벌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에 빠진다."라고 『피로사회』 에서 지적한 것처럼. '

피로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착취와 자기 공격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다 보니 몸이 계속 아프다고, 병들었다고 신호를 보낸다. 머리 아프고, 목이 아프고 배도 아프고. 아픈 게 요리조리 돌아가면서 백화점 식으로 병을 고 온다. 쪼끔만 공부해도 목이 아파, 너무 피곤해를 입에 달고 산다.  


    

“제가 죽일 놈이죠. 죽어버릴 거야.”란 말도 경태의 마음 한 켠에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그럴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경태 부모님도 또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좋은 학원 찾아 보내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손수 만들어서 균형 있는 식단까지 잘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시간 관리도 딱딱 맞춰서 제대로 관리를 하신다. 그렇게 서포트를 해 줌에도 불구하고 경태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게임밖에 없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수업할 때만 이해를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를 못한다.     


 

출처: huido0216@cctoday.co.kr: 충청투데이(https://www.cctoday.co.kr)



“제가 죽일 놈이죠.”를 연발하는 경태가 안쓰러워서 다독였다.


“경태! 우리에게는 아직 3시간이 남았나이다. 그러니 교과서부터 차근차근 다시 합시다.

이순신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했잖아.”  


        

경태랑 늦게까지 세계사 시험 범위를 다 끝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경태를 한껏 칭찬해줬다. 별로 감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싸면서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진순희’ 끝나고 나가는데 길바닥에 오만 원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진순희 국어논술학원을 ‘진순희’라고 부른다.)      


오만 원이? 이 밤에 오만 원이 왜 필요한데?  

 

게임 현질 하게요.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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