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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Jul 02. 2023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사랑의 주기도 짧아지고, 연령층도 낮아지고 있다.

중1 우진이가 쉬는 시간만 되면 흥얼대는 노래가 있다.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대부분 기분이 좋거나 표정이 밝을 텐데 우진이의 낯빛은 우수에 차있다.


어린 친구가 고민을 잔뜩 안고 무심한 듯 노래를 부른다. 우진이의 슬픔이 지속되고 있듯이, 노래 제목도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길다.



잔나비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를 나지막하게 부른다.


우진이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이 둘은 몇 달 전만 해도 학교가 떠나가도록 유명한 커플이었다. 인근 학교에서 '00중학교의 여신'이라고 소문난 은지가 여친이었다.


 다정한 우진이는 은지한테도 살갑게 굴어서 제법 오랜 기간 사귀었다. 요즘 아이들은 30일 기념일 100일 기념일을 챙길 정도로 연애의 주기도 아주 짧다.


우진이는 언제나 은지가 먼저였다. 학원이 늦게 끝나도 은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은지네 집이랑 우진이네 집은 아주 반대여서 은지를 데려다주고 오면 우진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그 길이 아주 멀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을 했다. 시험 기간에도 예외가 없었다. 보강한다고 학원이 밤 12시 가까이 끝날 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진이는 한결같았다.



우진이 베프인 성민이한테 물어봤다. "우진인 오래가네. 다른 애들 같지 않고?"

성민이가 말하길 "제가 봐도 우진이가 은지한테 너무 잘해요. 어휴, 여자 친구 생겨도 저는 그렇게 못할 거 같아요. 진짜 잘해준다니깐요."


"네가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는 거야" 했더니
"그렇게 고단하게 살 봐엔 차라리 여자 친구 없는 게 나아요." 볼멘소리를 했다.


성민이의 말처럼 우진이의 은지에 대한 사랑은 넓고도 깊었다. 친구들의 바람대로 오래갔으면 좋으련만 느닷없이 깨졌다. 그 이유가 '공부' 때문이었다.


중2 되면 특목고 준비해야 된다며 앞날을 위해서 이제 그만 만나고 공부하기로 결정을 했단다. 싫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공부 때문에 헤어진 거라 더 안타까움이 컸나 보다.


줌으로 얼굴 보면서 새벽까지 울었다고 했다. 40분 줌 사용이 무료인 때라 끊어지면 다시 하고 또 끊어지면 은지 줌으로 다시 하고 그렇게 울면서 이별식을 했단다. 마치 공중전화 끊어지면 안타까워 다시 걸고 했던 내 젊은 날 처럼. 그 모습이 중첩돼, 안쓰럽기까지 했다.




은지랑 헤어지고 나서 우진이는 사는 게 시들어진 듯했다. 그렇게 성실하던 친구가 숙제도 안 해오고 늦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교재도 안 갖고 와서 애간장을 태웠다.


몇 주를 기다려주다가 보다 못해 야단을 쳤다. 세상 다 끝난 표정으로 툭 뱉었다. 어린 친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선생님, 내 인생에서 여자는 은지 하나로 끝이 났어요.
살면서 은지 같은 여자는 더 이상 못 만날 거예요.


중1 남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치 인생을 다 산 사람 같았다. 지하 벙커까지 떨어진 우진이의 자존심이 회복될 수 있는 건 결국 시간과 사람이었다.

 

"공부 때문에 헤어진 거라 미련이 많이 남겠네" 하면서 틈만 나면 치킨 시켜주고, 피자도 시켜줬다. 뭐라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까 해서 자구책으로 한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민이가 다급한 소리로 전화를 했다.


쌤, 쌤, 쌤에엠 ~~

완전 개사기예요. 개사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고요옷!

그래서요, 제가 여자 친구 따위는 안 사귄다니까요.



무슨 일이냐며 자초지총부터 말 좀 해보라고 했다. 은지한테 새로운 남친이 생겼단다.


새로운 남친이? 우진이랑 헤어진 것이 공부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울면서 헤어졌다며. 대학 들어가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


"그랬지요. 그런데 그 여시 같은 은지가 바람 피웠어요."


학원을 옮기더니 옆의 학교 선배랑 사귄다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게다가 인스타에도 서로 허리 감고 사진 찍고, 볼따구에도 하트 붙이고 사진 찍었다고 성민이가 펄펄 뛰었다.


내가, 이래서 여자 친구를 안 만드는 거라면서 우진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너무 안 됐다고 전화 끊을 생각을 안 했다. 곧 수업해야 된다며 전화를 끊었다. 


코가 쑥 빠져있을 우진이가 떠올랐다.

우진이랑 성민이가 들어오는 데, 성민이가 입에 손을 대면서 모른 체하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한 시간 수업이 끝날 동안 우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까지 울면서 내게 말했던 것은 뭐지요? 사기였을까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은지가 울면서 내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다 거짓이었을까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순간은 진심이었을 거야. 그때는 은지도 진심이었어. 단지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야. 은지는 예쁜 데다, 공부에 크게 목숨 거는 친구는 아니잖아. 아마 은지도 안 하던 공부 하려니까 힘들었을 거야.


그때 너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애가 나타난 거지. 위로가 될 진 모르지만 사람에겐 시절인연이 있어. 이제 그 시절인연이 다한 거야. 하지만 은지와의 진심이었던 그런 추억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황량할 거야.


모르긴 몰라도 '공부'라는 목표는 은지 목표가 아니고 은지 어머니의 목표고 바람이었기에 중간에 실족했지 싶다.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
누가 내 가슴에다 불을 질렀나
누가 내 심장에다 못을 박았나
그대의 눈빛은 날 얼어붙게 해
그대여 다시 내게 마음을 주오

Love you, love you, love again
 Love again with you
짧지 않은 우리 함께 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

"love again Love again with you"를 부를 때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교실 한쪽 구석에 요가할 때 쓰는 긴 방망이가 있다. 우진이는 그 긴 방망이를 마이크 삼아 눈을 감고 소리를 질렀다. 은지가 없는 빈 방에 갇혀 우진이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학원에 우진이는 없다. 누나랑 뉴질랜드로 유학 갔다. 아이가 마음을 못 잡고 계속 방황하니까 참다못해 우진이 부모님께서 결정을 내리신 듯했다. 우진이 고모가 있는 작년 가을 뉴질랜드로 보내버렸다.



비는 오고 습하기는 하고 마음까지 가라앉고 있다. 유튜브에 잔나비의 "사랑하긴 했었나요 스쳐가는 인연이었나요 짧지 않은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 내 마음을 가둬두네"가 보였다. 잊었던 우진이 생각이 났다.



빈 집에 갇혀 있지 않기를,

아니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기를......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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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희의돈이되는책쓰기, #ChatGPT를활용해휘리릭브런치작가한방에되기

#영화로인문고전책읽기, #찰나의미학, #원숭이도쉽게따라하는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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