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도 말했다. "우리에게 진짜 생활은 현재뿐"이라고
전생에 귀족은 아니었나 보다. 필시 무수리였음이 분명하다. 사람을 섬기는 데는 도통했다. 아니 알아서 낮은 자세로 임한다. 함께 일하고 있는 강사들에게는 물론 심지어 가르치는 학생들도 받들어 모신다. 이러다 보니 심신이 피곤해져서 오래전부터 혼자서 일을 하다시피 하고 있다.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이 오면 숙제 검사부터 해야 하는 데도 밥은 먹었냐고부터 물어본다. 요즘 굶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멘트를 날리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하도 음식을 해 먹여서 그런지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도 학원 이름 대신 000 밥집은 아직도 성업 중이냐고 연락이 올 정도다.
마음이 약해서 거절도 잘 못한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놀기 좋아하는 시현이는 유학 가는 친구랑 송별 파티한다며 이번 주 수업에 빠진다고 통보를 했다. 몇 년 동안 못 볼 친구라서 쌤이 지금 내 부탁 들어주지 않으면 걔와의 우정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는 거라는 으름장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보충해 주면 안 되냐며 한참을 떼를 쓰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써먹었던 레퍼토리야. 절대 들어줄 수 없어. 단호하게 안돼! 그랬다가도 그래 이번만 그렇게 하고 다음번에는 절대 안 된다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한지, 이런 나의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일까. 애초부터 딱 부러지게 거절하는 유전자가 없는 건지 아니면 습관이 안 돼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해서 이러는 것일까. 혹은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나 스스로도 나의 심리가 궁금하다.
어쩌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대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요. 섬긴다는 말은 당신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하는 사람이 혹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바라보는 나는 다른 사람이 불편한 것이 없는지 그것부터 신경 쓰는 사람이다. 지나치게 상냥하다 못해 친절하기까지 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들이 고단하다.
그러던 차에 양창순 박사의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에 꽂혔다. '건강한 까칠함'이라니, 표현 한번 절묘하다. 까칠하되 그것도 건강하게 표현하려면 "명확하고 간결하게"가 핵심이란다.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는데 첫 번째가 자신의 의견에 대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 번째가 관건인데 끝까지 매너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조건에 많은 똑똑이들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머리 위에 남을 올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과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으면 사회생활을 꾸려나가기가 버겁다. 오죽하면 <<권력의 법칙>>을 쓴 로버트 그린은 상대방보다 멍청하게 보이라고까지 권유하고 있을까.
지식이 방대해서 걸어 다니는 만물박사라고 소문이 자자한 교수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너무 똑똑해서 잘난 체를 하면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분은 사회생활도 성공적으로 잘하고 계셨다. 궁금한 나머지 여쭤봤더니 그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진정한 고수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더라도 아는 체를 안 한단다. 어, 그러시냐고! 몰랐는데요 하면서 바짝 다가간단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놀랍다는 반응을 해주고 질문도 하고 헤어질 때에는 오늘 아주 귀한 만남을 가졌노라고. 모르는 것을 새롭게 한 수 배운 아주 의미 있는 날이었다며 상대를 칭찬한다고 하셨다. 알고 있는 것을 지루한 티를 안 내고 듣고 있는 그분의 인내심도 놀라웠다. 하지만 대화 상대자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자기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 흡족했으리라. 아마 평생 동안 교수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살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하나비>, <소나티네> 등을 만든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그는 알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이런 건 어떻게 찍으면 좋지?" 하고 스태프들한테 꼭 물어본단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테프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냄은 물론이다.
나이들어감을 어떻게 바라보고 실천해야 할 지에 대한 조언도 실려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세월에 맞게 더 성숙하고 성장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성장은 고사하고 퇴행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도 혁신과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이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마음에 활력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나이에 맞는 일을 하고 만남을 가지면 되니까 세월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함은 물론이다.
융의 조언대로 내 마음속 어린아이에게 자리를 내줄 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허무와 고독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도 지나가 버린 시간일 뿐이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일 뿐이다. 나와 상관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일뿐인 현재이다. 내게 주어진 최고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인생은 아름다워" 구호를 외치며 제2의 청년기를 보내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고 디자인이다.
사용설명서 없이 태어난 존재가 인간이란다. 다행히 이 책을 통해 '사람 사용 설명서'의 다양한 기출문제를 풀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내게 닥칠 예상 문제도 지혜롭게 잘 풀어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족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주어진다.
내 마음을 울리는 글귀: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지 마라. 평범한 기회를 잡아서 위대한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 있다.
"오직 하느님만이 처음 하는 일도 완벽하게 하는 법이다"란 말도 있다. 완벽주의에 대한 욕구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유용한 경구가 있을까 싶다.
톨스토이도 말했다. "우리에게 진짜 생활은 현재뿐"이라고. 따라서 현재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려는 일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역시 우리가 현재에 몰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에 불안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126쪽
"뛰어난 유머감각, 삶의 아이러니를 즐기고 터무니없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 어느 정도의 겸손함과 신중함,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절, 너그러운 마음씨가 있다면 그는 누구라도 파란 팀이 될 자격이 있다." (참고로 이런 매녀를 가진 사람들을 폴 오스터는 파란 팀이라고 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151쪽 작가 폴 오스터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폭넓고 충실하게 사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겐 오직 세 가지 자산밖에 없다. 나는 뭔가에 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모든 도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내면에 강력한 열정과 자율성을 갖고 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154쪽 엘리너 루스벨트
2012년 계간지 <미네르바>로 등단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 수료
진순희국어논술학원 &SUNI 책쓰기 아카데미 운영